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철강왕이기도 하지만 정치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고인은 육사 6기 출신으로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정계에 간접적으로나마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포항제철 건설의 주역으로, 한국 철강신화의 주인공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고인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11대 총선에서다. 민정당 소속 전국구의원이 된 고인은 13대와 14대 국회의원으로 민정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민정당 대표가 됐으나 곧바로 이뤄진 3당합당으로 대표최고위원 자리를 민주계의 김영삼에게 내주고 공화계의 대표였던 김종필과 함께 최고위원 자리를 맡았다.
'3당 합당' 이후에는 민자당 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 대표로 활동을 했으나 김영삼 대표를 앞세운 민주계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결국 김영삼 후보를 인정하지 않는 민정계 인사들을 규합하면서 '대안'으로 주목받기도 했으나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를 요구하다 김영삼 대표와 갈등을 빚은 끝에 그해 10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인 1993년 3월 포항제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고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5월 포항북구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고 같은 해 7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1997년 9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의 이른바 도쿄회담을 계기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에 합류한 뒤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이 타결되자 같은 해 11월 자민련 총재직에 취임했다. 이를 두고 DJT 연합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어 국민의정부 때인 2000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발탁됐다. 하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낙마하는 비운을 겪었다.
총리직 퇴임 이후 고인의 정계 복귀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를 외면했다.
포항'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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