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공사 다된 구조물 부실 알곤 "폭파시켜"

포스코 설립에 얽힌 비화

13일 별세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포철신화'를 일구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포스코 첫 설립 당시 정부는 종합제철의 설립을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고 했으나 박 명예회장은 책임의식이 희박해질 수도 있으므로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출발하자고 건의해 현재의 포스코가 잉태됐다. 회사 이름의 시안은 세 가지(고려종합제철, 한국종합제철, 포항종합제철)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선택으로 포항종합제철로 정해졌다.

제철소 건설 당시 포철 중앙도로 부근에 큰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훼손하면 재앙을 받아 죽는다는 미신으로 아무도 작업에 나서려고 하지 않아 지역 방송국에서 괴담의 사실무근을 방영하는 촌극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박태준의 지시로 구경꾼들 속에서 1시간 만에 불도저로 제거작업을 마친 일화도 있다.

또 사원주택단지 조성을 위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무턱대고 은행 문을 두드렸지만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당시 한일은행 하진수 은행장이 박태준 사장의 열의를 담보로 특별히 20억원을 대출, 무사히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현재 포스코 주거래 은행이 우리은행(옛 한일은행)인 것은 당시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인 것이었다.

포철 사원의 해외연수도 유명한 일화다. 연수 중 비밀 도면을 훔쳐보려고 상대를 술자리로 유인하고, 보여주지 않는 공장을 보려고 기지를 발휘하는 등 당사자들 누구나 연수생이 아니라 산업스파이로 나서는 듯한 조마조마한 긴장감에 휩싸여야 할 정도였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소 건설현장을 처음 방문한 자리에서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는 독백을 내뱉었다. 이를 들은 박태준은 술 끊기와 제철보국을 맹세하면서 제철소 건설에 매진했다.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오는 '우향우 정신'은 조상의 혈세(대일청구권자금)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신념을 표현한 것으로,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청탁에도 단호했다. 1971년 9월 대통령 선거로 관심이 쏠리던 시기 공화당 김성곤 재정위원장이 박 회장을 불러 포철의 설비 입찰에서 마루베니로 낙찰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처럼 1년 반 동안 무려 5번이나 마루베니에 특혜를 주라는 압력이 있었지만 박 회장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거절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박 회장에게 "소통령이라도 되느냐"고 했다. 박태준이 '소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포철은 걸음마부터 휘청거려야 했다는 이야기다.

1974년 6월 박 대통령 가족은 포철의 새 영빈관 '백록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백록대는 불과 한달 전에 완공된 국가원수급 내빈을 위한 숙소였다. 박 대통령이 박 회장을 불러 숙소를 왜 흰색으로 도색했는지 이유를 묻자, 한라산 '백록담'의 백(白)을 생각해서 희게 칠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백악관 냄새가 나서 싫다며 거부감을 표현했다. 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최초로 받은 기합'이었다.

박 회장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1977년 8월 발전송풍설비 공사현장을 돌아보던 박태준은 10㎝가량 콘크리트가 덜 쳐진 곳을 발견하고 공사가 80% 끝난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다음날 포철 안 모든 건설현장의 책임자와 간부, 외국인 기술감독자, 그리고 포철의 임직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폭파식은 모든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투입한 인력, 자재, 공기 등에서 손실을 보았지만 '포철의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는 값진 무형의 자산으로 남았다. 이 폭파사건은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MIT 경영학 교재에도 모범적인 경영관리 사례로 소개된 바 있다.

포항'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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