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정도면 행복한 거지. 뭘 더 바라냐?" 술잔을 기울이며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런저런 푸념들이 안주 삼아 떠돌다 문득 한 친구가 말을 던져놓는다. 뿌연 담배연기 속에 내던져진 푸념들은 말의 뉘앙스답게 푸석푸석하기 그지없다. 촉촉하게 맛깔지거나 쫄깃쫄깃 씹을 만한 건더기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아내(물론 '마누라'라고 했지만)만 해도 그렇다. 이부자리에서 이부자리까지(행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갈까봐 겁난다), 마치 바가지를 긁어대면 돈이나 쌀이라도 쏟아질 듯 열과 성을 다한다.
자식도 재롱떨고 아장거릴 때가 전부다.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할 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빠는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라고 대들더니만 이젠 아예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다. 벽을 마주 보며 수도에 정진하는 스님처럼 컴퓨터와 마주 앉아 끝없는 손놀림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더니 여차하면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태세다. 가끔 들어갔으면 싶기도 하다.
술잔은 비어지고 푸념은 푸석거리다 못해 잘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질 듯하다.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던 청춘은 어디 가고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달려 끝갈 데 없는 비굴함으로 버둥거리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가족과 회사 푸념을 갈무리할 즈음 정치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느새 술병은 텅 비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멀쩡한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마치 중대한 협상 테이블에 앉아 대단한 결심을 한 듯 누군가 외친다. "딱 한 병만 더하자." 누군가 답한다. "그래 정치 얘기하려면 술이 필요해."
그렇게 술잔도 비우고 맨정신도 비울 무렵, 뜬금없이 그 말이 날아들었다. "너 정도면 행복한 거지." 인체가 분해할 수 있는 알코올 정량을 넘어선 친구들은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이렇게 받아친다. "너쯤 되니까 그런 말을 하는거야. 너 정도만 돼도 바랄 게 없겠다." 조금 전까만 해도 누가 더 불행한가를 두고 마치 내기라도 하듯 땅속으로 파고들던 친구들은 이제 '네가 더 행복해' 경쟁에 뛰어들었다. 상대적으로 "내가 더 불행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래 듣고 보니 네가 더 불행해"라고 동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는 이것저것도 있고, 이런저런 즐거움도 있고, 이만저만한 조건도 갖췄다"며 행복 대열에서 단연 선두에 달리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더 붉어질 것도 없는데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내가 뭘…."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가만 듣고보니 그다지 불행한 것 같지는 않다. 조금은 내가 더 행복한 것 같아 우쭐해지는 기분도 약간 든다.
그러면서 둘러보니 친구들이 측은하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인가?" 싶기도 하다. 함께 건배를 외치는 친구들이 마치 자신을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은인인 양 고맙게 여겨진다. 세상이 행복해진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살림 꾸려가는 아내가 고맙고, 공부와는 담 쌓았어도 별 탈 없는 자식들이 고맙고, 아직까지 그만두라고 눈치주지 않는 회사가 고맙다. 물론 아무리 고마운 마음이 넘쳐나도 금배지를 달고 여의도에 모여있는 분(?)들에게 나눠줄 정도는 아니다 싶다. 어찌 됐건 잔돈은 됐다는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택시기사를 보며 행복해지고, 귀갓길에 사들고 간 통닭 한 마리에 환호하는 가족들을 보며 행복해진다. 비록 술냄새 풀풀 풍기지만 둘러앉은 가족들을 보며 짧은 연설을 늘어놓는다.
앞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나눴던 '행복, 비교당하기'를 끄집어내며, "결론적으로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감격에 겨워 눈시울도 살짝 붉혀본다. 닭다리를 뜯던 막내가 "아빠, 취했어?"라고 똘망거리며 묻자 곁에 있던 아내는 "냅둬라! 내일 아침이면 기억도 못할텐데. 좀 있으면 자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지마"라고 응수한다. 그러면서도 싫지않은 눈치다. 내친김에 아내와 큰딸과 막내아들에게 일일이 "이래서 고맙고, 저래서 감사하다"고 손을 꼭 쥐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아빠가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통닭을 뜯더니만 제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샐쭉거리며 한 마디 건넨다. "아빠도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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