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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 장군 무력항쟁 준비…청산리 전투 승리 직결"

서일 기념사업회 한'중 국제학술 포럼

14일 호텔 에어포트 2층 다이아몬드 홀에서 열린
14일 호텔 에어포트 2층 다이아몬드 홀에서 열린 '백포 평전과 논문 출판기념회 및 한'중 국제학술 포럼' 모습.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서영승씨
서영승씨

"독립군총재였던 백포 서일 장군의 무력항쟁 준비가 없었다면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승리도 없었다(?)"

서일 기념사업회(회장 서훈)는 14일 호텔 에어포트 2층 다이아몬드 홀에서'백포 평전과 논문 출판기념회 및 한'중 국제학술 포럼'을 열었다. 이날 포럼에선 서일 장군 고손자 서영승(25) 씨가 참석했고 정계와 학계, 언론계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포럼에선 ▷백포 서일과 독립운동 자료(서굉일'국학연구소장)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만주 독립군의 항전(김병기'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 ▷서일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이동언'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백포 평전(이광인'중국 절강월수외국어대학 교수) 등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백포 평전을 발표한 재중동포 이광인 교수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지금까지 1930년대와 40년대에 활약한 인물 중심으로 연구돼 온 까닭에 1910년대와 20년대 무력항쟁에 힘썼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명이 미흡하다. 이 때문에 백포 서일 장군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나흘간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대격전을 치른 청산리 전투는 3'1운동 직후 서일 장군이 만주 독립군을 재편성하면서 김좌진과 이범석 등을 맞아들여 대한(북로)군정서를 확대개편하고 강력한 무장단체로 훈련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서일 장군은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소련과 인접한 국경 등지에서 10여 개의 흩어졌던 독립군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단의 주력이 노령 자유시에서 참변을 당했고 후일을 기약하던 중 1921년 불의의 습격을 받아 다수의 독립군이 희생되는 비극을 맞아 통탄을 금하지 못한 끝에 그 다음날인 8월 27일 41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서영승 씨는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이 아직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면서 "중국에 비해 국내에 할아버지 관련 자료가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서 씨 가족은 광복 후에도 쭉 중국 하얼빈에 거주하다가 1998년 국내로 이주, 현재 인천시 연수동에 살고 있다.

서일 장군은 1881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해 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전념하다 신채호의 소개로 항일 비밀정치단체 신민회에서 활동했고 1911년 가족과 함께 두만강 너머 왕청현 덕원리로 이주, 항일단체 중광단 단장이 됐다. 1920년엔 대한군정서 산하 사관연성소를 설립해 청산리 전투와 동부전선 승리를 주도해 대한독립군단 총재로 추대됐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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