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자천교회와 권헌중 장로의 사철나무

19세기 말 지은 교회와 함께 귀한 생태자원

영천은 충절의 대명사로 불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약을 발명해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크게 공헌한 최무선(崔茂宣) 장군의 출생지라 그런지 어느 지역보다 호국의 얼이 짙게 밴 곳이다.

이런 맥락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권응수(權應銖), 정세아(鄭世雅) 등이 임란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현대에 와서도 육군의 핵심 간부를 양성하는 제3사관학교와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싸우다가 전사했거나 생존하고 있는 분들이 돌아가시면 모시는 국립영천호국원이 개원되어 명실공히 호국의 땅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국내 최대의 포도산지로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어 전국의 와인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영천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화북면 소재지 자천리를 찾았다. 한적한 시골이지만 번화한 어느 도시보다 일찍 기독교의 복음을 펼친 '자천교회와 교회를 세운 권헌중 장로가 심은 사철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자천은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뒤쪽에 교회가 있어 일부러 가지 않으면 찾기 힘든 곳에 자천교회(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가 있다.

교회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서 있다.

'이 교회는 1903년에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Erdman)이 신자들과 합심하여 지은 것으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한식교회다. 건물은 동서쪽으로 약간 긴 네모 형태의 우진각(모임)지붕이며, 주 출입구는 양 측면에 두었다. 내부 후면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부는 칸막이를 설치 남'여석을 구분하는 예배공간을 마련, 구(舊)한말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구조는 나지막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절충식 지붕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건축물은 선교(宣敎) 초기에 구미(歐美) 사람들이 지은 한'양 절충식으로 개신교사(改新敎史)와 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글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개신교사와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높다'는 데에 있다. 설립자 권헌중(1865~1925)은 이 교회 초대 장로다. 원래 경주 사람으로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고 한다. 시국이 어수선하자 고향을 떠나 은거하기 좋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청송군 현서면 수락에 정착했다.

그러나 청송에서의 생활도 경주와 크게 다르지 않자 1898년(고종 35) 4월 대구로 이사를 하기 위해 가족과 하인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노귀재(청송과 영천의 경계지점)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역시 경북 동부지역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영천에서 청송으로 가던 미국인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도 역시 같은 장소에서 쉬고 있었다.

키와 코가 크고, 눈동자가 파란 이방인을 처음 본 일행은 "야,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질렀다. 안의와는 서툰 우리말로 "우리는 괴물이 아니고 미국에서 온 야소교(耶蘇敎) 선교사들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인연으로 선비 권헌중은 선교사가 전한 성경을 열심히 읽어 새로운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마침내 대구로 이사 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천에 정착하여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서당과 기도소로 활용했다.

1903년 교회가 완성되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문을 열지 못하고 이듬해 면사무소와 지서를 지어주고야 마침내 완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데리고 있던 하인들도 풀어주었다.

그러나 선교활동은 면사무소나 지서를 지어주어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교회 내에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던 당시 여자를 교회에 보내지 않으려 했을 것이니 어쩌면 이 문제가 교회 문을 여는 데 더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예배당 앞에는 크기나 수령으로 볼 때 권 장로가 심은 것으로 보이는 사철나무 한 그루가 있다. 또한 이 나무 밑에 그가 잠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매우 이른 시기에 요즘 유행하는 수목장(樹木葬)의 주인공이 되었다.

영천에서 겨울 추위에 견딜 수 있는 대부분의 상록수가 소나무나 침엽수인 데 비해 사철나무는 활엽수다. 당시에는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나무였으리라 생각된다. 전국적으로 큰 사철나무가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이 나무 역시 교회와 함께 귀중한 생태자원이다.

기독교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19세기 말, 한 유학자의 어려운 결단으로 지어진 이 교회 예배당은 2008년 한국기독교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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