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846)는 신(神)이 된 지 오래였다. 9세기쯤부터 전국 곳곳의 절과 신사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이라는 이름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으로 숭앙받고 있다. 원래 신라명신은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모시던 토착 신이었다. 그러다 장보고의 위명이 널리 퍼지고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일본의 유력인사들이 늘어나면서 토착 신과 일체화된 것이다.
◆히에이산에서 만난 장보고
교토 북쪽에 자리 잡은 히에이산(比叡山)은 '영산(靈山)'으로 불린다. 민중 불교가 태동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산은 교토시와 시가현 오츠시를 구분 짓는 경계 지점에 있는데 경치가 일품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에 바다처럼 보이는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코(琵琶湖)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반대편으로 돌면 고색창연한 교토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산의 실제 주인은 엔라쿠지(延曆寺)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찰이다. 무려 1천700㏊의 넓이에 가람이 산 전체에 걸쳐 늘어서 있다. 8세기 말 사이초(最澄'767~822) 대사가 창건한 이후 숱한 고승을 배출, 천태종의 총본산으로 이름을 떨쳤다.
창건자 사이초 대사는 신라에서 도래한 호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찰 입구 간판에는 그를 '후한 효헌제의 후손'으로 써놓았다. 언제부터인가 신라계가 중국인으로 뒤바뀐 것이다.
장보고와 가장 관련 깊은 인물은 사이초 대사의 제자이자 3대 좌주(주지)였던 엔닌(圓仁'794~864) 대사다. 일본 불교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꼽히는 그는 장보고의 후원으로 당나라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귀국할 때도 신라 배를 이용했다. 당시 일본은 항해술이 미비해 중국행은 '죽음으로 가는 행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바닷길을 장악한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엔닌은 장보고가 세운 사찰인 산동반도의 적산 법화원(赤山 法華院)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를 직접 만났다. 자신의 9년 3개월간 유학생활을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장보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썼다.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을 더해갑니다'고 했다.
엔라쿠지의 대표적인 불당이자 국보인 근본중당(根本中堂) 뒤 언덕에는 완도군이 세운 '청해진 대사 장보고비'가 있다. 취재진을 안내한 다케다 코쇼(45'武田功正) 스님은 "일본 불교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장보고의 도움이 컸기에 근본중당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비를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신라명신을 모시는 적산궁
엔라쿠지 안에도 신라명신을 모시는 신사가 있었다. 근본중당에서 5㎞ 북쪽에 위치한 불당 횡천중당(橫川中堂) 바로 맞은편에는 '적산궁'(赤山宮)이라는 자그마한 신사가 있다. 적산은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있던 곳이다. 이 불당 앞 안내문에는 '엔닌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중국의 적산에서 신라명신을 불법연구의 수호신으로 하여 나누어 받았다. 자신의 주명신(呪命神)으로 모시고 그 공덕에 의해 10년간 수행이 끝났으므로 귀국 후 이 땅에 모셨다. 신라명신을 천태종 불법 수호신으로 모시고 그 덕택으로 재난을 없애고 수명을 늘렸다'고 써놓았다. 마지막에는 '신라명신은 지장보살의 화신'이라고 정의했다. 이곳에서 만난 엔라쿠지의 노승은 "적산궁은 원래 '적산신라명신궁'으로 불렸다"며 "과거 어느 시점부터 적산궁으로 줄여 불렀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100년 전의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신라명신은 엔닌 대사 이후 엔라쿠지의 불법 수호신으로 모실 정도로 대단한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엔닌 대사도 신라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옛 기록에 나와 있다. 그가 신라계 후손이었기에 장보고가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엔라쿠지 측은 이를 부정했다. 고바야시 소조(小林祖承'63) 스님은 "사이초 대사나 엔닌 대사를 신라계로 말하는 일본 학자도 있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명확한 기록도 있다"며 "신라는 친밀함을 갖고 교류한 소중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온조지의 신라선신당
엔라쿠지에서 10여㎞ 떨어진 인근 산에도 유명한 사찰이 있다. 온조지(圓城寺''미이데라'로도 불림)인데 오츠시의 중심가에 접해 있다. 이 사찰은 엔라쿠지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엔라쿠지의 5대 좌주였던 엔진(圓珍'814~891) 대사가 세웠다. 사이초 대사의 제자인 그도 당나라 유학파로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유학생활을 했다. 그는 귀국길에 풍랑을 만나 생사 기로에 놓여 있을 때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그대를 지켜주겠다'고 했고, 귀국 후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을 세워 신라명신을 모셨다. 그 노인은 장보고의 화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동문 사형제인 엔닌과 엔진 둘 다 개별적으로 신라명신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은 것이다.
경내에서 신라선신당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본당과 1㎞ 이상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시청과 학교,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다. 온조지 관계자는 "태평양전쟁 때 육군이 땅을 빼앗아가는 바람에 본당과 신라선신당이 따로 떨어지게 됐다"고 했다.
산기슭에 있는 신라선신당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은 전형적인 신사 건축물로 일본 국보다. 신사 안에는 역시 국보인 '신라명신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명신상은 산(山) 모양의 갓을 쓰고 갈색 도포를 입었으며 흰 수염을 드리운 노인의 풍모이다. 엔진 대사가 배에서 본 노인 모습을 재현해 만든 좌상이다. 신라명신상은 50년에 한 번씩 공개된다. 고바야시(小林) 스님은 "2008년 엔진 스님의 귀국 1천150주년을 기념해 오사카박물관에 전시한 적이 있지만 일반에게는 19년 전에 공개해 다시 보려면 31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사무라이의 표상도 신라계?
신라선신당 뒤편에는 '일본 무사의 표상'으로 불리는 한 무장의 묘소가 있다. 일본에서는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1045~1127)로 불리지만, 묘소 앞에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라 적혀 있다. 그는 신라명신 앞에서 관례(성인식)를 하고 신라사부로로 개명한 것이다. 붉은 갑옷을 입은 전쟁의 귀재였고 검술을 창안한 그는 천수를 다하고 이곳에 묻혔다. 그는 일본 고대 명문인 '겐지'(源) 가문의 명장인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겐지 가문 전체가 신라명신을 모셨기에 자연스레 신라명신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았을 것이다. 학자들은 겐지 가문을 신라계로 보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화랑도와 일본 무사도도 연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취재진은 신라명신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일본인들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일본의 정신적인 수도인 교토와 그 인근에서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붙어 있는 신(神)과 절, 신사, 인물을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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