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세계적인 기업인이기도 했지만 정치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최고 권력자의 절대적 신임, 또는 반목이 청암의 인생뿐 아니라 정치적인 삶을 갈라놓기도 했다.
청암의 삶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권력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육사 생도 시절 교수이던 박정희와 첫 만남 후 그의 인생 전반기는 박정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 때는 박정희의 보좌관이기도 했다. 현재의 포스코 신화도 박정희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지가 없었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정희는 1992년 광양제철소 4기 설비 준공식 후 청암이 그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를 찾아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할 정도로 믿고 의지했던 인물이었다. 청암은 그러나 박정희의 3선 개헌 지지 서명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고도 거부했다. 이를 두고 박정희는 "그 친구는 원래 그런 친구"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한지 짐작게 해주는 일화다.
박정희의 서거로 등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청암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한 장본인이다.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정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후 13, 14대까지 민정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전두환은 청암의 육사 후배로, 청암이 대령일 때 대위로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이후 청암이 제철소를 운영하는 데 막후에서 든든한 힘이 돼주기도 했다. 1981년 포철의 850만t 종합준공식에도 참석해 청암과 함께 화입식을 갖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청암의 넷째 딸 경아 씨와 전두환의 아들 재용 씨가 결혼, 혼맥으로 연결될 만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번 청암의 빈소에도 전직 대통령 가운데 전두환이 가장 먼저 조문을 하기도 했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정치적 갈등의 연속이었다. 청암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민정당 대표가 됐으나 곧바로 이뤄진 3당 합당으로 대표 자리를 김영삼에게 내준 데 이어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를 요구하다 김영삼과 갈등을 빚은 끝에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고 뇌물혐의로 기소되는 등 위기를 맞고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후 1997년 포항북구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김영삼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더욱 높이는 등 대립각을 세우며 반목했다. 김영삼은 전두환과 달리 청암 빈소에 문상하지 않고 14일 조화만 보내 두 사람의 애증 관계를 짐작게 했다.
노태우는 청암이 정치적인 시련을 겪게 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점에서 애증이 교차한다. 노태우에 의해 민정당 대표가 됐으나 노태우로부터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 불출마할 것을 종용받은데다 내각제를 요구하다 결국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서 결코 좋은 인연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암에게 정권적 동반자 관계였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면서 김영삼에게 빼앗겼던 포스코를 다시 찾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과는 1997년 도쿄회담을 계기로 DJT연합을 통해 자민련 총재까지 올랐다. 이어 김대중에 의해 2000년 국무총리로 발탁되기도 했다. 비록 4개월 만에 낙마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김대중은 청암이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데 역할을 했다.
포항'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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