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포항과 박태준

포항과 박태준

포항은 한적한 어촌이었다. 포스코가 가동되기 전의 케케묵은 과거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고 경제 유발 효과를 가진 곳이라고는 해병대 1사단뿐이었다. 1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먹고 소비하는 데 의존할 정도로 산업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1960, 70년대만 해도 해병대원들이 휴가나 외박을 나오면 사고를 치기 예사였다. 술집을 뒤엎고 난장판을 벌여 민원이 쏟아졌다. 그래서 포항시장과 유지들이 해병대 1사단장을 찾아가 강하게 항의했다. 이 사단장은 휴가'외박 가는 대원들을 트럭에 실어 버스터미널과 포항역으로 보낸 뒤 곧바로 고향에 가도록 했다. 그러자 식당, 술집에서는 장사가 안 돼 난리가 났다. 결국 포항시장이 다시 사단장을 찾아가 간청해 원래대로 됐다고 한다. 그 정도로 포항은 경제력 측면에서 열악한 지역이었다.

포스코가 포항으로 입지를 정한 것은 전적으로 박태준 명예회장 덕분이다. 당시 지역별로 종합제철소 유치전이 치열했다. 울산 삼천포 포항 월포 군산 등에서는 유치대회를 여는가 하면 정치인을 앞세운 청와대 로비도 치열했다. 1967년 종합제철소 부지 선정 용역 결과가 나왔다. 부지 조성, 공업용수, 항만, 전력 등 4개 부문에서 포항이 1위를 했다. 현재도 그러하듯 용역결과는 정치논리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실제로 그랬다.

'상당수 사람들은 포항이 아닌 곳을 지목했다. 경제기획원은 삼천포를 지목했다. 박태준만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포항이 제철소가 들어서야 할 적지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연히 다른 지역을 천거한 각료나 국회의원들로부터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이병기의 우리 친구 박태준) 박 명예회장은 박 전 대통령을 찾아가 포항이 왜 적지인지를 설득해 재가를 받았다. 글로벌 기업 포스코가 포항과 함께 발전한 것은 박 명예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 명예회장이 영면한 이후 포스코와 협력회사 직원들의 술집과 골프장 출입이 금지됐다. 술집과 식당들은 2만 명 가까운 근로자들이 오지 않으니 매출이 급감했다. 그렇더라도 술집, 식당 주인들이 박 명예회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어 큰 불만은 없다고 한다. 그 마음속에는 박 명예회장이 가신 이후에도 포스코가 '국민기업'으로 남아 포항 발전을 계속 이뤄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지 않겠는가.

박병선 동부지역본부장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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