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24)불세출의 타격왕 장효조 (중)

작고한 장효조 전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은 생전 자신의 야구인생을 이야기할 때 꼭 빠뜨리지 않고 '작은 키'를 강조했다. 프로필에 나와 있는 그의 키는 175㎝. 요즘 선수들에 비하면 단신이지만, 그가 선수로 활약했던 프로 초창기 때는 아주 작은 키는 아니었다. 중학교 때 또래보다 한 뼘이나 작았던 키는 장효조의 최대 콤플렉스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작은 키'는 불세출의 타격왕 장효조를 있게 한 결정적 동기였다.

장효조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지만 유소년 시절의 부산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1학년 때 2학년이었던 통장 집 형과 하루 동안 가출을 감행했던 일만 기억난다"는 그는 수업이 일찍 끝난 그날, 통장 집 형의 제안에 영도에서 서커스가 열리는 자성대까지 4시간을 걸었으나 결국 길을 잃고 경찰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 때문에 장효조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하지만 맞으면서도 서커스가 보고 싶다고 오기를 부렸고, 아버지는 휴일 아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야 했다. 그러나 서커스단은 이미 딴 곳으로 옮긴 뒤였다. 한 번 마음먹으면 기어이 끝을 보고 마는 고집이 그때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장효조는 대구로 이사와 다닌 삼덕초교 2학년 때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전학 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야구공이 시작이었다.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을 잠재우는 데는 야구공만 한 게 없었다. 공의 주인이라 더 많이 던질 특권을 누렸던 장효조는 어른들이 "조그만 녀석이 꽤 잘 던진다"고 말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4학년이 돼야 입단 자격을 준 야구부였지만 장효조는 떼를 써 3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첫 야구인생은 막을 내렸고, 1년 뒤 재입단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한 야구선수 선발 적성검사에서 자질이 특출해 선발된 것이었다.

불펜투수였던 장효조는 5학년 때 나선 첫 시합에서 교체 투수로 마운드에 섰고, 그날 삼덕초교는 승리를 거뒀다.

졸업을 앞둔 장효조는 당시 경북중 야구부의 스카우트 대상 1호였지만 작은 키가 문제였다. 그를 눈여겨본 당시 경북중 박창룡 감독(작고)이 교장을 모시고 야구장을 찾아 "저 선숩니다"라고 말하자 교장은 "너무 작잖아"라는 말만 남긴 채 시선을 거둬버린 것이다.

6학년 때까지 장효조는 대구에서 제일 작은 야구선수였다. 작은 키는 고교 진학마저 훼방을 놓았다. 대구중을 졸업하면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경북고 진학을 기대했으나 다시 작은 키가 문제 돼 입학이 좌절됐다. 공교롭게도 경북고 감독은 초교 때 그를 점찍어뒀던 박창룡 감독이었다.

중2 때 장효조의 부모는 그를 대구에 둔 채 서울로 이사를 갔다. 혼자가 된 장효조는 작은 키의 단점을 선구안으로 만회하려 필사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중3 때 장효조는 뒤늦게 아버지의 부음을 들어야 했다. 야구에 매진한 아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가족들은 두 달간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장효조가 작은 키에서 해방된 건 고교 2학년 중반을 지났을 때였다. "대구상고 1년 때 155㎝에 불과했던 키는 가을이 되자 165㎝로 컸고, 2학년 땐 다시 170㎝를 넘었다. 비로소 땅꼬마에서 벗어났다."

고교 때 장효조는 정규 연습이 끝나고서 운동장에 홀로 남기 일쑤였다. 땀에 젖을 때까지 운동장을 뛰었고, 허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100번, 다시 100번. 마지막 버스를 탈 때까지 개인훈련은 5시간째 이어졌다. 아플 때도 예외는 없었다.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은 열일곱, 고1 때 다 만들어졌다. 그때 눈물겨운 노력이 없었다면 장효조가 있었을까 가끔은 되묻는다." 생전 장효조는 그렇게 말했다.

당시 대구상고 강태정(67'전 태평양 감독) 감독의 머릿속에도 장효조는 독한 선수였다.

강 감독은 "키도 작고 체력도 약했다. 주전도 아니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야구를 그만두게 할 것인가를 물어 '잠재력이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 뒤 어머니는 가끔 저녁이 되면 도시락을 싸와 장효조에게 건넸고, 장효조는 끝을 모를 만큼 더욱더 운동에 몰입했다.(가족은 아버지를 여읜 뒤 대구로 다시 이사를 왔다)"고 말했다. 장효조는 때로 학교서 경비아저씨 몰래 혼자 밥을 지어먹었고, 집에 와서는 또다시 헌 타이어를 100번 두들기고 나서야 잠을 잤다.

남몰래 흘린 땀방울의 결실은 머잖아 광채를 드러냈다. 고2였던 1973년, 대구상고는 대통령배 대회 출전권을 얻었고, 팽팽한 투수전으로 흐르던 1차전 경남상고전에서 후보 장효조는 대타로 타석에 들어설 기회를 잡았다. 그는 "포볼이든 몸에 맞는 볼이든 무조건 살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깨끗한 안타를 쳤다. 고생하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귀중한 적시타로 팀은 승리했고, 그 후 2차전, 3차전 때 주전으로 경기장에 나섰다"고 회상했다.

대회를 마쳤을 때 대구상고는 정상에 서 있었다. '땅꼬마' 장효조는 처녀 출전한 대회서 타격 3위(11타수 4안타)를 차지하며 단숨에 주목받았고, 유망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5월 대통령배 제패로 돌풍의 서곡을 알린 대구상고는 8월 봉황기를 품은 데 이어 9월에는 황금사자기까지 거머쥐며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대통령배 때 대타로 나와 타격 3위에 오르며 혜성같이 등장한 장효조는 봉황기에서는 15타수 9안타의 불방망이로 타격왕과 최다안타상을 함께 거머쥐었고 황금사자기 대회(타격왕)에서는 10회 연장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안타를 때려내는 등 고교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 반열에 올랐다.

장효조는 "체구가 작아 언제 선수생활이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 그 단점을 보완하려 한 엄청난 훈련이었다"고 생전에 말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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