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마감이 임박하던 19일 오전 11시 본사 편집국. 한 시간 뒤 북한이 TV를 통해 중대 발표를 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정부 채널을 총가동해도 내용 파악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석간인 신문을 마감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갱판(신문을 새로 인쇄하는 것) 사태에 대비했다.
무슨 내용인지 몰랐기에 주요 지면 담당자들이 각자의 점심 약속들을 미룬 채 TV 속보를 주시했다. 이윽고 정오 뉴스가 전달되는데 아뿔싸…, '김정일 사망'이 발표됐다. 이미 윤전기가 절반을 돌았지만 곧장 '인쇄 중단' 지시를 내리곤 전면 재제작에 들어갔다.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할지도 모를 이런 중대사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자책했지만 지방에 위치한 신문사로선 불가항력이었다. 본지를 빨리 읽기를 기다린 독자들에게 '늦은 배달'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드린다. 하지만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사안이었기에 불가피했다는 점을 변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신문 제작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십만 부가 넘는 용지를 버린 것이 아깝기도 하지만 '정부의 정보 부재가 너무 심하다'는 판단에서다. 아니 대북한 정보 파악 능력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북한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사망 시각은 지난 주말인 17일 오전 8시 30분이었다. 이날 오후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순방에 나서 한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다음 날 귀국했다. 김 위원장이 사망한 직후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해외로 나간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북한이 조선중앙TV를 통해 4차례에 걸쳐 '특별방송'을 예고한 19일 오전 청와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71번째 생일과 41번째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는 축하 모임이 열렸다고 한다. 직원 200여 명이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낮에는 오찬이 예정돼 있었으나 특별방송을 보고 부랴부랴 취소했단다.
군 당국도 캄캄한 건 마찬가지였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김정일 사망 보도가 전해질 때 국회에 있었다. 합참의장은 전방 부대를 시찰 중이었다. 주무 부처인 통일부나 외교부도 '특별방송' 직전까지 '남북 관계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고 태무심했다. 지방에 있는 신문사도 특별방송에 대비한 제작 준비를 하는데 주무부처 직원들은 식사를 하러 밖에 나갔다가 보도를 보고 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왔다. 남북한의 긴장 관계가 역대 어느 정권 때보다 더 살벌한 상황에서 정보 채널은 허술하기 짝이 없고 공복들의 자세는 민초들보다 못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동선 파악은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업무이지만 국정원이나 군 당국은 김정일 사망과 관련한 아무런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국정원장이나 국방장관도 TV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다. 정보가 없으니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국민들에게 참 면목이 없게 됐다.
김정일 사망과 관련해 삼성이 사망 정보를 발표 전에 입수한 것으로 알려져 정부의 정보 수집 능력이 민간 기업에도 뒤졌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19일 평양에 있었던 남북평화운동본부 도영주 상임이사에 따르면 방송 얼마뒤 호텔에 있는 김정일 대형 초상화가 흰 천으로 덮혔다고 한다. 보도 즉시 초상화를 가렸다는 것은 지시가 미리 내려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정보기관들이 이런 정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면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국정원과 정보사 등 정보기관들은 국회조차 어쩌지 못하는 예산을 쓰고 있다. 심지어 직원 급여까지 비밀로 분류돼 있다. 비슷한 직급 일반 공무원들보다 2배 이상의 예산을 쓴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동안 국정원은 북한이나 외국의 정보 수집 및 분석보다는 국내 문제에 더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호텔에 잠입해 외국 정부 요원 방을 뒤지다가 경찰에 잡히는가 하면 중국에서 장기간 구금당하는 직원의 사례도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모사드처럼 국민의 권리 보호를 위해 맹활약한다는 인상은 아직 주지 못하고 있다.
이번 김정일 사망에 따른 정보 부재는 어물쩍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다. 대통령은 물론 국민 전체를 망신시켰다. 책임자 문책은 물론 전반적인 시스템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
최정암/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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