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남자가 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부엌 문턱이었다. 기성 세대들은 "남자는 부엌 근처에도 얼씬 거려서는 안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은 흉이 아니라 멋이 됐다. 각종 요리 강좌에서 요리를 배우는 남자들의 모습은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됐다. 사랑 받는 남자의 조건으로 요리가 꼽힐 만큼 요리하는 남자는 인기도 많다. 지난해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와 연애결혼 정보업체 '커플예감 필링유'가 미혼여성 269명을 대상으로 '애인이 어떤 장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23.4%가 요리를 꼽았다. 요리는 '노래'(33.8%)와 '악기연주'(29%)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요리 잘하는 남자'가 여자들을 설레게 하는 남성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요리프로그램도 이젠 남자들 차지
TV를 켜면 요리하는 남자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파스타'(MBC)와 '이웃집 웬수'(SBS)는 남자 요리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올 5월 인기리에 종영된 KBS 일일연속극 '웃어라 동해야' 역시 주인공 동해의 직업은 요리사였다.
여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요리프로그램도 남자들이 장악했다. 여자 요리전문가가 한복을 곱게 입고 나와 레시피를 설명하던 모습은 이제 구시대 유물이 됐다. 가수 알렉스'이현우, 오상진 아나운서, 개그맨 박수홍은 요리프로그램 진행자인 동시에 직접 요리를 만들어 선보이는 요리하는 남자들이다.
특히 알렉스는 자신의 요리 노하우를 담은 '알렉스의 스푼', 이현우는 오랜 싱글 생활에서 터득한 요리 비법을 담은 '싱글을 위한 이지쿠킹'이라는 요리책을 펴낼 만큼 뛰어난 요리 실력을 자랑한다. 또 박수홍은 EBS 요리프로그램 '최고의 요리비결'을 진행하면서 요리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연예인들 화보 촬영에도 요리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그룹 2AM의 멤버 창민은 '요리하는 남자'라는 콘셉트을 앞세워 여심을 자극하는 화보를 촬영했다. 패션매거진 '슈어'의 화보촬영 현장에서 창민은 마이크 대신 후라이팬을 들고 나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해주는 로맨스 가이의 매력을 뽐냈다.
◆요리하는 남자, 일상의 풍경
요리하는 남자는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 요리강좌나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는 남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매주 월요일 대구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진행되는 '약이 되는 약선음식' 강좌를 보면 눈에 띄는 수강생이 있다. 6명의 수강생 가운데 유일한 남자인 이화남(73) 씨다. 그는 3개월 과정인 '약이 되는 약선음식' 강좌에 부인과 함께 등록해 요리를 배우고 있다. 계명대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2003년 정년 퇴임한 이 씨는 젊어서부터 집에서 요리를 많이 했다. 맞벌이를 한 까닭에 가사분담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방일을 하게 된 것. 이 씨는 "나이 먹을수록 염려되는 것이 건강이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다 약선 요리강좌가 있어 등록했다. 배운 요리를 집에서 만들어 먹는 재미가 있어 요리 배우는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대구백화점 문화센터가 개설한 '케이크 앤 쿠키' 강좌에도 40대 후반의 남자 수강생이 있다. 또 롯데백화점 대구점 문화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정요리' 강좌와 '이태리'프랑스 요리' 강좌에서도 남자 수강생을 만날 수 있다. 밑반찬과 찌게 등의 요리법을 배우는 '가정요리' 강좌와 스파게티'리조또 등의 레시피를 익히는 '이태리'프랑스 요리' 강좌에는 각각 2명의 중년 남성들이 수강하고 있다. 대구백화점 문화센터 관계자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모습에서 친화적인 아버지 모습으로 변화하는 세태를 반영하듯 요리강좌에 관심을 갖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특히 '어린이와 함께하는 요리'라는 제목이 붙은 단기특강은 인기가 많다. 남자 수강생들이 수십명 몰리는 경우도 있다. 요리가 아버지와 자녀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만드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요리를 배우지 않더라도 다년간 단련된 솜씨로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남자들도 있다. 직장인 안상진(56) 씨는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생선을 사와 요리를 할 정도로 요리 마니아다. 그는 학원을 다닌 적은 없지만 요리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수십년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익힌 자신만의 요리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안 씨는 "요리하는 시간이 즐겁다. 음식점에서 새로운 요리를 보면 만들고 싶어져 주인에게 레시피를 물은 뒤 꼭 집에서 실습을 해 본다. 그렇게 하나 하나 요리를 익힌 세월이 20년을 넘었다"고 말했다.
요리하는 남자들이 늘면서 남자만을 위한 요리강좌도 등장했다. 미국육류수출협회는 지난달 16일부터 이달 6일까지 겨울학기 요리교실을 개최했다. 이번 겨울학기 요리교실의 특징은 남자 수강생만을 대상으로 한 요리교실을 별도로 개설한 것이다. 올해 9년째 운영되고 있는 샘표식품의 요리교실 '지미원'도 남자 수강생이 꾸준히 늘면서 지난해부터 아예 남자들만 참여할 수 있는 요리교실을 개설했다.
요리뿐만 아니라 제과제빵 분야에도 남자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대구제과제빵학원 자격증 취득 오전반의 경우 8명의 수강생 가운데 4명이 남자다. 또 직장인을 위해 개설한 재직자반에도 10명의 수강생 가운데 2명이 남자다. 이경숙 대구제과제빵학원 원장은 "남자들의 부엌 출입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취미로 제과제빵을 배우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또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제과제빵 자격증으로 눈을 돌리는 남자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요리하는 이유는 제각각
남자들이 요리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요리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요리가 남자들의 취미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면서 요리 배우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박성우(57) 씨는 군인 출신이다. 남성미 물씬 풍기는 외모와 달리 그는 요리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2년 전 전역을 앞두고 한식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류천술(65) 씨는 1년여 동안 달성군여성문화복지센터에서 한식 요리를 배웠다. 현재 류 씨가 할 수 있는 한식 요리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웬만한 한식 요리는 모두 할 수 있을 정도다. 류 씨는 "요리에 관심이 많아 가끔 집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평생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기만 했는데 퇴직 후 시간이 많아 아내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어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취미로 요리를 시작해 전문가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있다. 조영래(59) 전 경북대병원장은 요리하는 의사로 유명하다. 현재 칠곡경북대병원 자궁암센터 교수로 있는 조 전 원장은 평소 전통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요리를 만들고 레시피를 지인들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달 '요리를 사랑하는 의사'라는 책도 펴냈다.
요리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도 요리하는 남자들이 늘어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SK커뮤니케이션즈가 올 4월 싸이월드 '드림 캠페인'에 등록된 장래 희망 1만733건을 연령별로 분석한 결과, 10대의 경우 가수 다음으로 요리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응답자가 많았다. 또 경제난으로 재취업 또는 창업을 위해 요리를 배우는 남자들도 늘고 있다.
신라요리직업전문학교에 따르면 올해 한식'중식'일식'양식 등 각종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요리를 배운 남자들은 220여 명에 이른다. 연령대도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10, 20대는 주로 취업을 위해 요리사 자격증에 도전한 반면 30~50대는 창업과 재취업을 위해 요리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배승근 신라요리직업전문학교 대표는 "예전에 비해 요리에 관심을 갖고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남자들이 많아졌다. 특히 실업 훈련의 일환으로 마련한 취업'창업 강좌에는 남성들의 증가세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 난 것도 요리하는 남자들이 많아진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가사분담 차원에서 요리를 하는 남편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직장인 이진수(43) 씨는 "아내도 일을 하는 만큼 집안일은 나누어서 하고 있다. 시간이 허락하는데로 밥 짓기뿐 아니라 간단한 밑반찬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민 또는 유학을 가기 위해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사례도 있다. 배진호(29) 씨는 올해 초 한식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내년 호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인 그는 학비 부담을 덜기 위한 방편으로 한식 요리사 자격증을 땄다. 배 씨는 "요리사 자격증이 있으면 한국 음식점 등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유학 준비를 하는 도중 틈틈이 시간을 내서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설명했다.
드물지만 '신랑 수업' 차원에서 요리를 배우는 경우도 있다. 최근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뒤 새로운 직장을 준비 중인 김모(30) 씨는 한식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있다. 그는 "새로운 직장을 잡으면 곧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할 생각이다. 결혼을 하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을 했다. 요즘은 요리를 할 줄 알아야 사랑 받는 남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요리를 배우는 남자들도 있다. 이홍란 지미원 원장은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요리를 배우는 남자들이 있다. 젊은 남성들은 요리에 관심이 있어 요리교실을 찾지만 중년 남성은 요리를 해야하는 필요성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게스트로 섹슈얼
요리하는 남자들이 늘어나면서 '게스트로 섹슈얼'(gastro sexual)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게스트로 섹슈얼'은 미식가를 뜻하는 '게스트로놈'(gastronome)과 성적 매력을 암시하는 '섹슈얼'(sexual)의 합성어로 '요리솜씨로 여성을 매혹시키는 남자'를 의미한다. 영국 소비자 조사단체 '퓨처파운데이션'은 '게스트로 섹슈얼'을 주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며 즐거움을 느끼는 25~44세의 남자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또 '퓨처파운데이션'은 18~34세의 영국 남자의 23%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요리를 하며 18세 이상 영국 여자 중 48%가 요리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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