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는 1992년 시즌이 끝난 후 롯데 타격코치로 제2의 야구인생을 열었다. 그는 '타격 달인'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는데 전념했다.
그렇게 6년을 보낸 장효조는 더 넓은 야구 세계를 경험하러 1999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가 택한 곳은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리그팀. 낯선 땅에서의 코치연수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라운드 밖에서도 '뭐든 제대로 해내야 성이 풀리는' 악바리 근성으로 선진야구를 익혀갔다.
장효조는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모여 있는 미국 무대는 걸음마 단계를 막 뗀 한국과 많은 것이 달랐다. 특이했던 건 코치가 선수들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건 선수의 노력 여하에 달렸고, 선수들은 스스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임을 깨달았다"고 생전에 말했다.
그해 11월 장효조는 다시 한국 땅을 밟았고, 행선지는 대구였다. 삼성의 2군 타격코치가 된 것이다.
"여러 감정이 솟구쳤다. 그러나 서운함은 접기로 했다." 생전 장효조는 삼성과의 관계를 짤막한 말 한마디로 정리했다.
현역시절 장효조는 삼성의 기둥선수였다. 그러나 1988년 12월, 그는 장태수(현 삼성 2군 감독)와 함께 롯데 행을 통보받았다. 롯데의 김용철, 이문한과의 2대2 트레이드였다. 삼성에서 버림받은 장효조는 배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성은 "간판타자였지만 우승을 위해서는 큰 경기에 강한 선수들 영입해야 했다"고 트레이드의 이유를 들었다.
'야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던 장효조는 찬바람을 맞으며 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83년 입단하면서 단 등번호 10번은 89년 정성룡, 93년 양준혁에게 넘어간 후 김기태와 김주찬에게로 이어졌다. 2002년 양준혁이 다시 받은 이 번호는 양준혁이 은퇴하며 영구 결번됐다. 돌이켜보면 장효조의 10번은 대구상고(현 상원고) 후배 양준혁에게 대물림됐고, 그 운명도 함께 전해졌다.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장효조의 타격기술까지 전해져 양준혁은 통산 최다홈런 등 공격 9개 부문의 최고기록을 남겼지만 원치 않은 트레이드의 아픔까지 공유하게 된 것이다.
장효조와 삼성과의 만남은 길지 못했다. 2000년 장효조는 다시 삼성과 작별했다. 그러나 2군 타격코치로 있던 그해, 장효조는 비록 나흘간이었지만 '감독대행'으로 1군 무대서 사자군단을 지휘하는 감격을 맛봤다.
김용희 감독과 계형철 투수코치, 이순철 주루코치가 한꺼번에 중징계를 당해 감독이 벤치에 나오지 못하게 되면서 장효조는 2000년 6월 28일부터 7월 1일까지 나흘간 6경기서 삼성의 지휘봉을 잡았다. 6경기 중 두 번의 연속경기를 치른 그는 마무리 임창용을 4경기에 투입하며 승리를 지켜냈다. 이 기간 삭발투혼의 주장 김기태가 역전 홈런을 날리며 맹활약했고 이승엽과 이계성, 박동희도 승리에 한몫을 거들었다. 1군 무대 성적은 4승2무. 완벽한 임무수행이었다.
장효조가 다시 삼성에 입성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였다. 이번엔 스카우트 코치였다. 그는 고교와 대학야구 현장을 누볐다.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야구장을 떠났다. 스트라이크와 볼을 가려냈던 매서운 선구안처럼 '제2의 장효조'를 찾기에 노심초사했다.
그런 장효조는 2009년 9월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로 현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이듬해 류중일 감독이 새로운 삼성 사령탑을 맡자 2군 감독에 선임됐다. 유망주 육성을 총괄하는 2군 감독으로서 장효조는 선수들에게 기술적 조언 못지않게 강한 정신력을 요구했다. 양일환 2군 투수코치는 "장 감독은 선수들에게 목표의식을 갖도록 했다. 심리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면서 반복된 훈련으로 기량을 끌어올리는데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대표적 선수가 배영섭이다. 2009년 입단, 오른쪽 어깨수술을 받고 1년을 통째로 쉰 배영섭은 지난해까지 대부분을 2군에 머무르며 장효조의 특별 지도를 받으며 사자군단의 톱타자로 성장했다. 올 시즌 신인왕을 거머쥔 그는 "장 감독님 덕분에 이런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특히, 타격 폼을 많이 잡아주셨는데, 타석에서 서두르지 말라고 계속 강조했다. 장 감독님께서 내가 신인왕을 받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이 되기 5개월 전 경산볼파크서 만난 장효조는 2군 선수들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수들이 멀어지자, 개개인의 장단점을 기자에게 소개하며 머지않아 1군에서 이름을 알릴 재목이라고 귀띔해줬다. '늘 긴장하고 모자람을 채워라.' 장효조식 조련 방법이었다.
그가 조련한 제자들은 1군에서 실력을 발휘했고, 삼성은 올해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장효조는 자식 같은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2011년 9월 7일 오전 7시30분 간암으로 투병하던 장효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55세였다. 지금까지 이룬 것보다 앞으로 이뤄야 할 것이 더 많은 그였기에 모두 안타까워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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