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학교 폭력 해법, 신뢰회복이 먼저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쓴 어느 책의 대목이다. 선생은 길을 가다 벌레를 잡아 태연히 날개를 찢고 다리를 뜯으며 노는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에겐 고작 무료함을 달래 주는 놀이련만 벌레에도, 선생의 눈에도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선생은 이를 두고 '잔인한 동심'이라고 한탄하면서 아이들을 폭력에 오염시킨 어른들을 책망한다.

연말을 맞은 대구 교육계가 어느 때보다 침통한 분위기다. 동급생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세상을 저버린 중학생 A군의 사연 때문이다. 그간 성적 비관으로, 왕따 피해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예가 종종 알려져 왔지만, 이번 사건이 주는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서를 통해 알려진 피해 학생의 고통을 보노라면 학부모라면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가해학생들은 A군을 노예 부리듯 했다. 제 집처럼 A군의 집을 들락거렸고 제 호주머니 털듯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싶으면 하루에도 수십 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내 욕하고 협박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지경의 짓들을 강요했다. 가해학생들이 침입할까 봐 현관문 비밀번호를 꼭 바꾸라고 당부한 유서 대목에서 A군이 감내해야 했을 공포의 정도를 짐작했을 수 있다. 이건 이미 '범죄' 수준이다. 그래서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이건만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이 사무친다. '너희 반에서는 혹시…'라며 제 아이를 다그친 부모도 상당수였다. 학부모들의 불안감이 그만큼 커져 있다.

대구시교육청의 당혹스러움도 유례가 없을 정도다. A군이 숨지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지 나흘 만인 24일 대구에서 여고생 한 명이 신병을 비관해 투신하면서 시교육청은 졸지에 면목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 때문에 교육감이 두 차례의 서한문을 담아 학부모들에게 죄송함을 표했다. 26일 오전에는 1천500여 명의 대구 초'중'고교 교장과 생활지도'상담교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긴급 대책회의까지 열었다. 그 자리에서 교육감은 의례적인 인사말을 생략한 채 이례적으로 A군의 유서 전문을 낭독했고, 유서의 내용을 들으며 흐느낌을 참지 못한 교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교육문제처럼 학교폭력에 관한 대한민국의 시스템은 이미 잘 갖춰져 있다. 대구시교육청이 발간한 30여 쪽짜리 '건강하고 안전한 교육환경 조성을 위한 학교폭력'성폭력 예방 매뉴얼 북'만 봐도,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어떤 징후를 보이면 학교 폭력 피해가 의심되는지 세세하게 예시돼 있다. 학교폭력 및 금품피해 조사 설문지에는 신고 요령이 자세히 안내돼 있다. 담임교사가 해야 할 일도 순서도처럼 잘 정리돼 있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신뢰다. 대구생명의전화 자살예방센터가 최근 북구지역 중'고교생 3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1 대구 지역 청소년 자살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교육당국이 또 변죽만 울리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응답자 중 중학교 2학년 때 자살 충동이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는데, 교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는 100명 중 1명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고민을 믿고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교사, 또래 친구는 어떤 학교 폭력 예방 매뉴얼보다 훌륭하다. 사춘기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교사나 또래 친구가 더 믿고 의지할 만하다.

대구시교육청이 고민해야 할 대목은 학교폭력 피해실태 전수조사나 가해 학생 엄벌 따위가 아니라 교사가, 학교가 학생들로부터 왜 불신받고 있는지를 알고, 신뢰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최병고기자/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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