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팔공산은 영남의 신라, 한강 이북의 왕건, 금강 이남의 견훤의 각축장이었다. 안족(雁足) 위에 현(絃)처럼 팽팽하던 긴장은 왕건이 경북 북부를 세력에 넣으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야심가였던 견훤도 질세라 927년 고려의 배후였던 신라를 말굽으로 유린해 버린다.
백두대간의 동서에서 각축하던 두 세력은 마침내 팔공산자락에서 일전을 벌이니 '공산전투' 또는 '동수대전'(桐藪大戰)이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패하고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이 전투 패배의 후유증 때문에 왕건은 3년 후에야 겨우 군사를 추슬러 후백제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 전투 이래로 팔공산 자락에는 왕건의 패주 동선(動線)을 따라 온갖 에피소드들이 남게 되었다.
◆대구경북 주민들에게는 모태와 같은 의미=생활의 터전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호국의 산성으로 팔공산은 대구경북 사람들에게 모태(母胎)와 같은 존재다.
선사시대 동서변은 신석기인들이 땅을 일구던 삶의 터전이었고 은해사골에서는 신라 화랑들의 기합소리가 산자락을 울렸다. 가산산성의 남포루(南砲樓)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포성을 울려 영남을 지켰고 한국전쟁 때 팔공산 가산 자락은 시신을 쌓아 올려가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곳이다. 옛날 팔공산은 봇짐꾼들이 재를 넘고 스님들의 장이 서던 생활의 현장이요, 지금은 흐릿하게 남아있지만 20여 개에 이르는 재는 마을과 마을을, 물산(物産)과 물산을 잇던 교통로였다.
산의 외형도 만만치 않다. 총면적만 95.7㎢, 가산~갓바위에 이르는 주능선만 20㎞가 넘고 환성산-초례봉 구간까지 합치면 100리를 훨씬 상회한다.
팔공산처럼 등산로의 조합이 자유로운 산도 드물다. 짧게는 염불암-동봉, 갓바위 코스부터 가산-파계재-동봉-갓바위까지 가능하고 여기서 치산계곡이나 은해사 쪽으로 외연을 넓혀가는 조합도 가능하다. 일부 준족들은 가'팔'환'초(가산'팔공산'환성산'초례봉) 46㎞를 무박으로 내달리기도 한다.
2009년은 팔공산에는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동안 군사시설에 의해 통제되던 비로봉(毘盧峰'1,193m)이 40여 년 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등반권과 국가시설의 충돌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구미 금오산이나 광주 무등산에선 아직도 높은 철책이 일반인의 발길을 들이지 않는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팔공산 답사에 나섰다. 산행 루트는 주차장-염불암-비로봉-동봉-느패재(능성재)-은해사 코스로 잡았다. 중급(中級)이지만 코스가 다양하고 동봉의 설경, 바위병풍 구간의 암릉과 은해사골 암자의 한적한 풍경에 빠져들기에 좋다. 들머리 탑골에 들어서자 청량한 기운이 발걸음을 가볍게 들어 올린다. '일석일망'(一石一望), 무수한 돌탑 더미에는 비슷한 부피의 기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철 구조물에 갇힌 비로봉 풍경에 씁쓸=동지(冬至) 바람은 무척 찼다. 9부 능선쯤 올라서자 살짝 비치던 눈은 동'서봉 갈림길에서 제법 눈발이 굵어졌다. 눈 속에서 겨우 비로봉 능선을 찾아 오른다. 가파른 계단을 더듬어 올라가니 통신탑의 거대한 위용과 철조망들이 앞을 막아선다. 매년 정초에 산신제를 지낸다는 천제단조차 철 구조물 한쪽에서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봉과 서봉을 좌우에 거느리며 팔공산의 주봉 역할을 했던 비로봉은 그 위용을 국가에 저당 잡히고 이젠 관가의 구조물로 전락해 있었다.
팔공산은 비로봉을 중심축에 두고 가지런히 양분된다. 가산-파계재-서봉은 동봉-느패재(능성재) 갓바위와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동에 바위병풍을 두고 서에 톱날 능선을 배치한 것도 똑같다. 산을 개방하면서 따로 길을 내 비로봉과 동봉은 능선으로 연결된다.
바람을 헤치며 동봉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협곡의 기류를 타고 눈발이 휘날린다. 인파를 뚫고 정상에 안착했다. 동봉엔 눈발이 몰아쳐 서 있기조차 힘들다. 바람을 피해 동부능선으로 급히 진행한다.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섰을 뿐인데 눈은 자취를 감추고 바람도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산의 날씨는 역시 변화무쌍하다.
산객들은 따뜻한 양지를 찾아 도시락을 풀어 놓는다. 이제 능선은 조금씩 고도를 낮추며 경치를 꺼내 놓는다. 미타봉을 내려서자 일군의 암릉들이 펼쳐진다. 바위병풍이다. 서부능선의 톱날바위와 함께 팔공산을 명산 반열에 올려놓은 1등 공신이다.
능선에서 감상하는 바위경치도 아름답지만 바위병풍은 염불암 쪽에서 올려다보면 더 진가를 발휘한다. 이 경치를 선조들은 '금병장'(錦屛墻)으로 불렀고 팔공산 8경에도 포함시켰다.
병풍바위로 시원스럽게 뻗어가던 능선은 도마재에 이르러 잠시 몸을 낮춘다. 도마재는 영천 신녕면 치산리와 대구 동화사를 잇던 통로.
산은 다시 신녕봉으로 이어진다. 이 봉우리를 경계로 대구와 영천이 마주 본다. 봉우리는 북으로 신녕지맥을 열며 산줄기를 뻗어간다.
삿갓봉으로 잠시 솟구치던 능선은 안부를 펼치며 800m로 낮아진다. 여기가 바로 느패재(능성재). 파계재 이후 동부능선에서 가장 낮은 재다. 이 고개를 경계로 서쪽으로 팔공CC와 동쪽으로 은해사골이 나눠진다. 옛날 포항의 해산물이 영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할 때 요긴한 길목이었다. '어염고도'(魚鹽古道)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은해사골 곳곳엔 김유신 장군의 수행 흔적=고개를 지난 능선은 살짝 고도를 높이며 동쪽으로 아담한 산줄기를 하나 뻗쳐 놓는다. 오늘 마지막 코스인 은해사골이다. 한적한 숲길이 이어진다. 골로 접어들자마자 산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인파가 잦아든 길 사색이 그 틈을 비집는다.
숲길을 30분 남짓 걸었을까. 중암암 이정표가 옷깃을 잡아끈다. 이 암자는 불굴사, 장군수 석굴과 함께 김유신의 수행처로 알려진 곳이다. 그가 벼슬길에 있었을 땐 대구, 영천, 경산을 아우르는 군주(軍主)의 지위에 있었으니 이 지역과 그의 인연은 각별하다 하겠다.
중암암을 나와 1시간쯤 진행하면 인종(仁宗) 태실이 나오고 내리막길로 곧장 내려서면 은해사로 이어진다.
은해사 일대는 남진하는 왕건과 신라를 제압하고 북진을 서두르던 후백제가 처음 충돌한 곳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왕건은 곧장 공산으로 도주했다. 두 세력은 동화사 일대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때 '왕건 패주로'를 따라 온갖 에피소드들이 만들어졌다. 패전 과정이 스토리텔링으로 남은 것도 흥미롭다.
동화사와 은해사를 잇는 약 15㎞ 코스. 이 길을 따라 왕건과 김유신은 시차를 달리하며 한 공간에서 만났다. 둘 모두 곳곳에 숱한 일화를 남겼지만 지금 세(勢)를 얻은 건 왕건의 일화다. 장수로서 치욕인 패전을 감추지 않은 왕건의 도량 덕일 것이다.
민심은 승승장구한 엘리트 위인보다 실수하는 인간적인 캐릭터에 더 열광한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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