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말연시에는 한라산에 함박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한라산을 오르는 코스에 우열을 매겨 순위를 정할 순 없다. 성판악, 관음사, 어리목, 영실 등 한라산을 오르는 4개 코스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나는 가장 짧지만 오르막이 분명하고 구상목 터널을 지나 펼쳐지는 넓은 평원이 마음에 들어 영실 코스를 가장 좋아한다.
영실주차장에 내려 등산화 끈을 졸라 맬 때부터 엷은 흥분이 찾아온다. 문득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라고 읊은 일본의 방랑시인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에 나오는 삼행시가 생각난다. 세상에, 살아 있음의 기쁨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한 시는 여태 본 일이 없다. 나도 읊는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위세오름을 오르다니."
개울을 건너 오르막 초입에 이르니 등산객들이 엎드려 아이젠을 신는다. 나도 신는다. 여름철에 터널을 이루고 있던 관목 숲이 옷을 벗고 맨살로 매운 바람 앞에 마주 서있다. 강인함의 표상 같기도 하고 연필을 쥐고 있는 화가 앞에 꼼짝 않고 서있는 누드모델 같기도 하다. 가엾어라.
영실에서 위세오름까지는 3.7㎞이다. 성판악(9.6㎞), 관음사(8.7㎞), 어리목(4.7㎞)에 비하면 최단거리다. 그렇지만 오름이 있고, 제주 말로 '선작지왓'이란 멋진 평원이 있고, 변화무상한 하늘과 구름이 있고, 그 사이로 매와 까마귀가 뜨고, 더 높게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비행기가 날아간다. 이만한 풍경이 또 어디 있을까.
2개의 스틱을 짚고 오르기 시작하면 100m 단위로 표지판이 서있다. 그건 쉬고 싶은 유혹이다. 전망대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사방을 둘러본다. 2시 방향 쯤에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쳐져있다. 제주 10경 중에서도 이름난 오백나한 파노라마다. 한 이틀 내린 눈이 절벽을 덮어 흑백의 터치가 절묘하다. 겸재나 단원의 산수화 중에서 절벽을 그리다 말고 군데군데 먹을 생략한 그런 그림 같다.
오백나한 풍경은 근사한 전설 하나를 물고 있다. 이 근처 어딘가에 살던 설문대할망이 아들 500명을 키우고 있었다. 아들들은 양식을 구하러 집을 나가고 할망 혼자서 큰 가마솥에 죽을 끓이고 있었다. 솥 밑의 죽이 눋지 말라고 여기저기 젓고 다니다 그만 펄펄 끓는 죽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가장 늦게 돌아온 막내가 죽 누렁지를 먹으려고 솥 밑을 긁어보니 사람의 뼈가 걸려 나왔다.
막내는 그게 엄마 뼈 인줄 알았다. 그 길로 고산리 앞바다 차귀도로 내려가 어머니를 그리며 슬피 울다 장군바위로 변했다. 나머지 499명의 아들들은 이곳 병풍 속 오백장군 바위로 굳어 오늘도 어미를 그리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 영실 기암은 비가 많이 오면 기암절벽 사이로 폭포가 생겨 장관을 이룬다. 사람들은 영실 폭포를 비가 와야 물이 흐른다고 '비와야 폭포'(B-waya falls)라 부른다. 서귀포 강정동 악근천 상류의 '엉또 폭포'도 '비와야 폭포'로 불려 지기도 한다.
오백나한이 보이는 오르막을 올라서면 함박눈을 뒤집어쓴 구상나무가 징글벨을 부르고 있다. 썰매도 사슴도 없지만 마냥 즐겁다. 연전까지만 해도 징검다리 같은 둥근 돌을 밟으며 숲 사이를 지나다녔는데 요즘은 널빤지를 깐 산책로가 하늘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평원은 정말 신들의 정원이라 할만치 아름답다. '선작지왓'은 '돌들이 서있는 밭'이란 뜻인데 아무리 큰 눈이 와도 군데군데 서있는 돌들은 묻히지 않고 그야말로 화폭으로 남아 있다.
봄에는 철쭉과 털 진달래가 무리 지어 피어 꽃 바다를 이루고, 여름에는 녹색의 장원으로 변한다. 오늘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하얀 나라,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싶다. 산행을 함께한 세 사람의 도반들에겐 "천천히 오라"고 이르고는 혼자 위세오름으로 냅다 달렸다. 컵라면 4개에 뜨거운 물을 붓고 캔 맥주 몇 개를 눈 속에 묻어 두었다. 얼굴이 꽁꽁 얼어 도착한 도반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맥주 안주로 컵 라면 만치 맛있는 게 없네."
내년에도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 크리스마스에도 위세오름을 오르다니"란 시구를 크게 읊조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큰절, 바로!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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