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향인사] 지자체-중앙정부 상생해법은 '인사 교류'…이삼걸 행안부 제2차관

이삼걸(56) 행정안전부 제2차관에게는 공직자의 피가 흐른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공무원생활을 한 지 거의 30여 년이 됐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타협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더 좋았다.

"조정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에 적합했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원에서 직장 잘 바꿨습니다. 정책을 세우고 밀고 나가고 난관에 부딪히면 타고 넘어가고 설득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이 차관은 '행정의 달인'이다. 지방재정과 지방세제, 지방행정, 지방감사과장 등을 지냈고 경북도에서 기획관리실장과 행정부지사를 역임하는 등 중앙과 지방을 오가면서 현장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다. "달인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지만 행정에 관한 거의 모든 업무를 섭렵했습니다. 경북도에서도 장기발전계획과 예산확보 방안까지 다 수립하고 중앙부처와의 연계까지 거치지 않은 분야가 없습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고시(24회)에 합격, 경북도청 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그때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서울로 올라갔으니 그와 경북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결혼하기 위해 대구에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경북도는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 뒤 그는 경북도 기획관리실장으로 1년 6개월간 일하다가 행안부로 복귀, 지방재정국장으로 일했고 김관용 지사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 경북도 행정부지사로 다시 내려왔다. 그러다가 올 6월 행안부 차관보로 승진했고 다시 3개월여 만에 행안부 차관에 전격기용됐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저를 만들어 준 것은 경북도에서 근무한 것이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잊지 않고 두고두고 갚아 나갈 생각입니다."

그는 최인기 장관 시절, '독일병정'으로도 불렸다. 과장 시절 공무원 노조 등과 부딪치면서도 저돌적으로 추진력을 발휘하자 최 전 장관이 간부회의에서 칭찬하면서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는 "중간간부 시절에는 그런 강한 추진력이 필요하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화합하고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를 표현하는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수식어도 그를 다 드러내지는 못한다. 사실 그는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는 고생스런 우여곡절을 겪었다. 고향인 안동에서 '꽤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그는 고교 진학을 앞두고 인문계에 진학,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하라는 부친의 권유에 상경, 덕수상고에 진학했다. 상고를 졸업하고 외환은행에 취업한 그는 야간대학에 입학, 공부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오늘의 이삼걸 차관을 만들어 낸 바닥이 됐다.

덕수상고 인맥도 보이지 않는 바람막이로 작용했을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차관을 지낸 반장식 전 기획예산처 차관은 그의 1년 선배였고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그의 고교 동기다. 또 김용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은 1년 후배일 정도로 덕수상고는 우리 시대의 걸출한 공직자들을 배출해 낸 인재의 산실로 꼽힌다.

중앙과 지방을 오가면서 행정 전 분야를 경험한 이 차관에게 지방자치단체와 중앙부처와의 인사교류는 상생의 해법 중 하나다. 그러나 대구시, 경북도 공무원과 중앙부처와의 교류는 다른 시도 수준에 비해서는 아직 크게 못 미친다. "가능한 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 부딪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들을 모았을 때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차관은 "경북도는 어느 정도 부처와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그런 점에 대해 저도 나름대로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면서 "지방에서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도 결과는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자신도 조금 늦게 경북도에 내려갔지만 결국 차관 자리에까지 오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안동시 풍산면이 고향인 그는 '촌놈' 같은 외모와 달리 영어를 곧잘 하는 해외파다. 미국 시라큐스대로 유학을 가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 재단 뉴욕사무소장을 맡아 4년여를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는 "차관이 된 지 얼마 안 됐고 지금은 이 정부의 마무리를 잘하라는 뜻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면서도 "30년 동안 쌓아 온 행정 경험과 노하우, 테크닉을 발휘해 지역과 국가 발전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