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경상북도 K지사님이 겪은 실화다. 지사 퇴임 후 시골면장을 자원해 고향에서 봉사한 청렴, 순박한 도지사로 알려진 K지사, 그분이 어느 초겨울날 언론사 논설위원들과 회식을 겸한 술자리를 가졌다. 퇴근 직후 빈속에 만만찮은 호주가(豪酒家)들과 거푸 맞대작을 하다 보니 금세 술기운이 올라버렸다. 호스트인 지사가 먼저 대취해버리자 자연스레 술자리가 평소 모임 때보다 훨씬 일찍 끝나버렸다.
식당 입구서 손님들과 헤어진 지사가 비서진을 찾았으나 흔적이 없었다. 수행 비서들은 으레 두어 시간쯤 지나야 술자리가 끝날 줄 짐작하고 자기네들끼리 근처 다른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가고 없었던 것이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기다렸으면 비서들이 돌아왔을 텐데 술에 취한 지사는 관사 쪽 방향만 어림짐작, 혼자 시내버스를 타버렸다. 비몽사몽 달리는 버스 안에서 관사가 하마나 보이려나 창밖을 기웃거렸지만 관용차만 타고 다닌 지사가 어디가 어딘지 알 리가 없었다. 드디어 버스 기사가 '종점이다'며 내리라고 했다. 떠밀리다시피 내린 곳이 지금의 화원유원지 부근, 허허벌판에 내려 일단 파출소를 찾았다. 술기운 속에서도 경비전화로 도청으로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 도지사인데 경비전화 좀 씁시다.' 다리가 풀린 웬 술꾼이 도지사라며 들어와 경비전화를 쓰겠다니 젊은 순경이 '오늘 밤 또 주정뱅이 한 명 들어왔네!' 하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지사 많이 닮았네! ㅋㅋ.'
옥신각신 끝에 지사를 알아본 파출소장이 들어오고서야 경비전화가 도청으로 연결되고 실종된 지사를 찾고 있던 비서들이 달려오면서 경비전화 소동은 끝났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도지사와 경비전화 소동을 두고 우리 사회가 함께 생각해 볼 게 있다.
'나 도지산데 경비전화 좀 씁시다'라는 지사에게 젊은 순경이 '지사 많이 닮았네! ㅋㅋ' 했던 그 시절만 해도 애교가 있었다. 물론 순경을 시골로 발령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난주 내내 인터넷에 패러디 풍자가 떠돌았던 경기도지사의 119전화 소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문수 경기도지사:'나 도지사인데 전화 받는 분 누구세요.'
젊은 소방관:'(이름 끝까지 안 대고)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비상전화로… 딸깍!'-
패턴이 거의 비슷한 도지사의 비상전화 얘기인데 왜 30여 년 전엔 가벼운 에피소드로 기억될 수 있었고 요즘 세상엔 좌천 발령→트위터 공격→좌천 발령 취소→지사 화해 방문 등으로 까칠하게 처리되고 떨떠름한 파장을 남기는 것일까.
단순한 전화 해프닝으로 치부해 버리면 끝날 사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도지사 전화 소동의 밑바닥에서 우리는 이 시대, 이 사회에 존경받는 권위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반추해야 한다. 큰어른이 없다거나 정신적 지주나 시대정신 등의 거창한 담론까지 나오지 않아도 좋다. 지금 우리는 권위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고 우리 스스로 자초했다. 대통령까지 '카카 새끼'로 비하되는 상황에서 도지사 전화쯤이야…. 왕따로 자살하는 아이들도 따져보면 자신을 지켜줄 절대 권위의 존재가 보이지 않아서 절망하고 자살하는 것이다. 비행 학생을 꾸지람도 못하는 교사에게 자신을 왕따로부터 지켜줄 만한 권위와 힘이 없다는 걸 아는데 구원 상담을 해올 리 없다.
이러한 총체적 권위 상실은 어디서 왔는가. 소수 기득 권력 계층의 이기적 부패가 먼저 빌미를 던진 건 맞다. 그 약점을 비집고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던 파괴적 민주화 세력이 '카카새끼' 같은 막말 공격을 멋있는 지식 계급의 훈장쯤으로 여기며 권위 파괴의 불씨를 지폈다. 그들은 권위를 조롱하고 깨는 것보다 참 권위를 세워나가는 것이 진보적 사회로의 진화임을 생각해 보는 진지함보다는 나꼼수 같은 '입 사냥'에 더 열광한다. 그냥 막 설치고 막 지껄이고 마구 깨뜨린다.
집권 여당이 비대위로 맞서 새로운 권위로 새로운 혁신에 나섰지만 새 권위를 제대로 못 세우면 공천 경합이 시작되는 순간 실패한다. 벌써 흔들리고 있는 걸 보라. 지금 우리 사회를 지켜낼 절대 권위는 기득 정치 세력의 대혁신과 상위 보수 계층이 근검과 정직으로 존경받는 데서부터 새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소방관은 도지사 전화를 깍듯이 받고 왕따 학생은 교사에게 달려가 손을 내미는 세상이 온다. 새해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보자.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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