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톡톡 진로·진학] 스스로 꿈꾸게 하라

문이 열리며 엄마가 쑥 들어선다. 뒤따르는 중2 여학생의 표정은 별무관심이다. 엄마는 앉자마자 딸의 들쭉날쭉한 과목별 성적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다. "영어 점수는 그럭저럭 나오는데 수학이 지난 시험에 비해 많이 떨어졌어요. 과학은 선행을 안 해서 좀 힘들어하고요."

중학생 상담은 늘 이런 식이다. 마치 수능시험을 코앞에 두고 모의고사 성적을 걱정하는 고3학생과 마주앉는 분위기다. 학생에게 "어른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이 뭐니?"라고 묻는데 엄마가 치고 들어온다. "약대 갈 거예요. 생명공학이나 화학과 쪽으로 진학한 뒤 약학전문대학원 시험 준비해야죠." 엄마는 약사가 되는 길을 꿰고 있다는 듯 주저리주저리 뱉어댄다.

정색하고 다시 묻는다. "지금 자신이 공부를 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니?" "……" 학생도 엄마도 묵묵부답이다. "그럼 수학과 과학 성적을 왜 올려야 하는지는 생각해봤니?" 마지못해 대답한다. "수학, 과학 점수 때문에 등수를 까먹어요. 등수 올리려면 수학, 과학 시험 잘 쳐야 하잖아요." "등수가 네겐 어떤 의미지?" 대답은 들으나마나. 집안 분위기와 모녀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올려야 하는 숫자일 뿐이다. 엄마가 냉큼 끼어든다. "아직 중학생인데 진로 고민보다는 성적 올리는 게 훨씬 중요하잖아요."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대부분 자녀의 진로를 자신이 설계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유교적 사고방식에다 88만원, 이태백, 사오정 같은 세대 용어가 난무하는 현실의 칼바람이 더해진 탓이다. 자녀들도 대학에 갈 때까지 학부모를 최고의 나침반으로 여긴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들고 나서야 학과를 고르기 위해 부모자식이 머리를 맞대는 현실은 여기서 비롯된다. 선택의 기준은 당연히 적성이나 소질이 아니라 점수다.

문제는 대학입시 제도와 학교 교육과정이 이와 같은 태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가는 데 있다. 단순히 대입 수시모집 비중이 60%를 넘어섰다는 수치 얘기가 아니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창의적 체험활동이 학교 교육의 핵심으로 도입되고, 중'고교에서 수행한 모든 활동을 기록하는 에듀팟이 가동되고, 이를 바탕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입학사정관 전형과 서류 평가가 확대되는 등 교육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전환되고 있다.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은 진로 설정이다. 학생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얼마나 일찍부터 탐색하고, 적성을 찾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결과물을 쌓느냐에 따라 학교생활과 대학 진학 가능성 자체가 달라진다.

더 중요한 건 학습이나 활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진로 설정이라는 사실이다.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직업을 꿈꾸게 만들면 학생들은 금세 주체적이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한다. 설령 중도에 원하는 진로가 바뀐다고 해도 노력과 변화의 과정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학문에 뜻을 둔다는 의미의 지학(志學)은 열다섯 살을 가리킨다. 진로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일어서는 중2 여학생의 표정이 들어올 때에 비해 한층 밝아지는 걸 보면 열다섯 살에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듯하다.

김재경 (사)지식플러스 교육연구소 소장(njoyedu@naver.com)

※새해부터 한원경 대구시교육청 장학관의 '깊은 생각 열린 교육' 연재가 마무리되고, 김재경 (사)지식플러스 교육연구소 소장의 '톡톡 진로'진학'이 격주로 연재됩니다. 교육과정과 입시제도 변화에 따라 학생, 학부모들이 느끼는 고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코너로 꾸려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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