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나에겐 아직도 일조가 있다

여인은 세상살이에 아무런 어려움을 몰랐다. 남편 돈 잘 벌겠다 아이들 공부 잘하겠다, 그 덕에 입때껏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다.

그런 그녀의 삶에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남편이 무단히 도박에 손을 대면서부터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석돌보다 못하다고 했던가. 더없이 착하고 성실하기만 하던 남편은 한 번 도박에 빠지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알토란 같은 집이 하루아침에 도박 빚으로 남의 손에 넘어갔다. 물려받은 토지들이 타인의 명의로 바뀌었다. 손때 묻은 가재도구들마저 트럭에 실려 나갔다. 도박 중독의 폐해는 마약 중독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다. 마지막에는 마누라까지 팔아넘기게 되는 것이 도박의 끝이라고 하지 않는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은 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렸다. 여인은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갈 길을 잃은 그녀는 마침내 아이들과 동반자살을 기도하며 치사량의 수면제를 입에다 털어 넣었다.

사람이 죽을 운명은 따로 있다고 했던가. 사경을 헤맨 지 며칠, 결국 아이들만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채 극적으로 깨어났다. 한동안 넋을 놓고 지내던 여인은, 이왕지사 이렇게 된 일 죽기 아니면 살기다 작정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순간 번갯불이 스치듯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다고 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도저히 중과부적이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장군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선조에게 이렇게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장군의 이 장계에 그녀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재산을 잃는 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는 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신외무물'이라는 가르침도 있다. 몸이 성치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온갖 고생과 노력 끝에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한들 건강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나지 않았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것이 돈이다.

경제 위기가 닥치자 돈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의 여인은 수많은 번민과 고뇌 끝에 마침내 열을 내려놓고 하나를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그래, 나에겐 아직도 일조(日照)가 있지 않느냐.' 이렇게 희망적인 쪽으로 생각을 바꾸고 보니 동녘에 떠오르는 해가 눈물겹도록 고맙게 다가오더라고 했다.

 '세상 모든 일은 오로지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 새삼 가슴에 새기고픈 말씀이다.

곽흥렬/수필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