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에서 흘러온 낙동강의 물줄기는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묘골'로 통한다. 지형이 묘하게 생겼다 해서 묘골(妙谷)이다.
마을 주변의 산은 병풍처럼 낮다. 북쪽으로는 왜관 가는 길이 나 있고 동쪽은 기곡과 대평리, 남쪽은 감문, 서쪽은 하산리로 통한다.
묘골은 사육신 가운데 한 명인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유일한 혈육인 둘째아들 박순(일산)이 성종 10년(1479)에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그는 묘골 박씨(순천 박씨)의 시조다.
마을에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에다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육신사(六臣祠)를 만나게 된다. 육신사와 나란히 자리 잡은 태고정(太古亭)은 박팽년의 유일한 유복자손인 일산이 지은 것으로 본래 99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됐던 것을 후손 박충후가 다시 세웠고, 광해군 6년(1614)에 중건됐다.
일시루(一是樓) 라고도 불리는 태고정은 장방형의 축단 위에 섰다. 정면 4칸, 측면 2칸, 건평 99㎡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녕대군의 친필인 태고정 현판과 취금헌의 초천자(草千字'초서로 쓴 천자문)가 있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부엌과 방, 대청 2칸에 방 1칸이 이어진 삼량가(三樑架) 홑처마로 돼 있다.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을 위한 별묘(別廟)와 강당인 낙빈서원도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다. 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됐다가 1923년 유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묘골에는 박팽년과 관련된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정조 2년(1778) 대사성 서정공 박문현이 지은 도곡재(陶谷齋)도 눈여겨볼 만하다. 1800년대에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이름 붙여졌다.
일반적인 사랑채 형태이며,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후대에 와서 헛간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각처럼 꾸몄다. 자연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운 납도리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사람으로 문장, 절의, 덕행을 모두 겸비하여 동방의 1인자라 칭송받았으나 병자호란 때 전사한 인물이다.
금서헌((錦西軒)은 현종 5년(1664)에 박팽년의 8대손인 박중휘가 지었고 융희 3년(1909) 박기동이 중수했다. 삼충각은 영조 5년(1775) 경상도 관찰사 김양순이 박팽년과 아들 박순, 손자 일산을 기리기 위해 산하 수령들로부터 경비를 거둬 세운 비각이다.
영조 45년(1769) 박팽년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박성수가 지금의 정침터에 살림집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라 삼가헌(三可軒)이라 명명했다.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박성수의 아들 박광석이 1809년 안채를, 1827년 사랑채를 새로 지었다.
1874년 박광석의 손자인 박규현이 서당으로 사용하던 별당에 누마루를 부설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 안에 걸린 '삼가헌기'(三可軒記)에 따르면, '삼가'(三可)란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뜻으로 선비의 기상을 담고 있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별당채 등이 앉아 있다. 대문채 안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있어 앞뒤 3중으로 배치되고 담너머에 넓은 연못과 정자가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각각 'ㄱ'자 변형으로 두 채가 마주하여 튼 'ㅁ'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를 삼가헌이라 하고, 별당을 '하엽정'(荷葉亭)이라 부르며 각기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의 특징은 4칸 마루 뒤편에 서고 1칸이 배치됐다. 그 끝에 우물과 장독대에 작은 방이 있는 점과, 사랑채 정면을 통과해서 내당으로 들어서는 안대문이 사랑채 마루와 마당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묘골 박씨들은 지금도 전통주인 삼해주(三亥酒)와 송순주(松筍酒)를 빚고 있다. 삼해주는 쌀로 떡을 만들어 깔고 누룩가루를 넣는다. 그위에 소주를 조금 부은 다음 정월 첫 해일(亥日)에 솔잎을 넣어 발효시킨 후 삼해일(三亥日:12×3=36일)에 마신다.
송순주는 솔잎이 새로 나는 3월에 솔잎을 가루로 만들고 누룩가루는 삼해주보다 두 배쯤 더 넣어서 두 달쯤 그대로 익히면 된다. 박팽년의 호가 취금헌(醉琴軒)이다. 멋과 풍류에 취한다는 뜻과 맞아떨어진다.
묘리에는 바위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구전되고 있다. 묘리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왜관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아들바위 혹은 장군바위라 불리는 큰 바위를 만나게 된다. 아들이 없는 사람이 이 바위 앞에서 왼손으로 돌을 던져 그 돌이 바위 왼쪽에 떨어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원병온 이여송 장군이 묘리에서 사흘간 머무는 동안 풍수가로부터 이곳에 큰 장수가 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곧 붓을 들어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쪼개지면서 엉엉 우는 소리가 고개를 진동했고, 바위고개의 지맥에 쇠창을 박으니 그 자리에서 피가 흘러 낙동강을 붉게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권율, 김성일과 더불어 의병을 이끌어 공을 세운 박팽년의 후손 박충후에게 두 딸이 있었다. 큰딸이 인근 하산 마을의 이종택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딸이 언니의 시댁에 놀러간 사이에 왜군들이 들이닥쳤다. 두 자매가 함께 도망을 치다 낙동강에 이르렀다.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자 높은 바위에 올라가 그대로 낙동강 물에 뛰어내리고 말았다. 이때 하늘에서 내리친 벼락과 함께 그 바위가 둘로 쪼개졌다. 지금은 '자매바위'라고 불린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매일신문·달성군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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