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두꺼운 역사책에서 뚜렷하게 각인되는 연도가 있다. 서양 역사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등이 그러하고 우리 역사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76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역사 시험을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 연도들은 사회적 모순이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하거나 대담한 모험과 전쟁이 거대한 변화를 초래한 해로 기록되고 있다.
새롭게 밝은 2012년도 예사롭지 않은 한 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금융 자본의 탐욕에 저항하는 미국 월가의 시위가 세계적으로 파급되면서 올해에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각 국가적 움직임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해에는 우리나라에서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치러지고 미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영향력이 큰 국가들에서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고 권력 교체가 이뤄진다.
사정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국가들 중 우리나라는 전례 없는 변화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올해를 기점으로 정치 체제를 혁신적으로 바꿔 '2013년 체제'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 이는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지 27년 뒤인 1987년에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가 있었고 그 후 25년 주기에 해당하는 올해에 혁명적인 탈바꿈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이다. 4'19혁명으로 국민들의 피폐한 삶을 외면한 독재 정권에 항거했지만 군사 정권에 의해 무산되고 이후 경제적 형편은 나아지게 됐으나 자유는 유린됐다. 이에 맞선 민주화 시위로 민주주의가 진전됐지만 어느 순간 국민들의 삶이 질곡에 빠진 것이 그간의 세월이다.
눈부신 경제 발전만큼 그 속에 드리운 현실의 그늘도 짙어지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극심한 양극화와 이로 인한 계층 대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 소수의 부자가 부를 독점하면서 가난한 이들이 폭넓게 퍼지고 있고 몇몇 대기업이 국가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지만 그 구조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더 절망적인 것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에 골몰하고 있으며 이를 개선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될 만한 제도 개선에는 신속히 반발하면서도 어려운 계층을 배려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정치권력이 이 같은 현실을 부추기거나 방치했다. 구시대의 낡은 관료들에 의존하고 오류가 드러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행정으로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권의 가치가 소홀하게 취급되고 언론 장악과 종합편성채널의 무리한 확장 등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결과도 낳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심판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분노한 민심이 꿈틀대자 정치권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새해 들어 가속화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국회의원 특권 포기를 선언하는가 하면 정강에서 '보수'를 빼자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통합을 이룬 뒤 모바일 경선 방식을 도입해 당 대표 선출에 나서는 등 국민들에게 다가가려 애쓰고 있다. 유권자들이 현역 의원을 대거 물갈이해야 한다는 여론을 보이고 있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 의지를 보이는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다급해진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감시망이 발달해 숨을 곳이 없게 됐다.
그러나 정치권의 변화는 아직까지는 보이기 위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국민들을 골고루 잘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모순적 현실과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진정성 있게 와 닿지가 않는다. 등 돌린 민심을 회복하려면 심각한 양극화 해소 대책, 재벌 개혁, 경제 시스템의 혁신, 온기가 퍼지는 복지 정책 등 피부에 와 닿는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 개혁을 흉내 내는 정도의 안이한 발상으로는 국민들의 진심 어린 지지를 받기가 힘들 것이다.
2012년은 임계점에 달한 총제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고 주저앉느냐를 가름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분수령이 될 것이다. 정치권과 대기업 등 경제 주도층들은 이러한 엄중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같은 점을 잘 알고 있는 국민들은 총선과 대선을 맞아 표로 심판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정치권이 국민들의 뜻을 헤아려 뼛속까지 변해야만 우리는 새로운 도약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金知奭/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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