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인사로부터 영덕군 창수면 무안박씨 종택의 오래된 향나무와 누워서 자라고 있는 큰 소나무를 보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부랴부랴 찾아 나섰다가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찾아간 곳은 같은 영덕군 창수면이기는 하나 수리라는 마을로 향나무는커녕 나무 한 그루 없는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박의장(朴毅長)의 재사(齋舍) 덕후루(德厚樓'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였다. 그러나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박의장이 1555년(명종 10)에 영해에서 태어났으며, 성리학자 김언기(金彦璣)로부터 학문을 배워 경사(經史)에 밝았다는 것과 1577년(선조 10) 무과에 합격해 진해현감을 거쳐 경주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왜란이 일어나자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동래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수장(首長) 이각이 싸워보지도 아니하고 퇴각하자 이어 부임한 박진과 함께 화차와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경주성 탈환에 성공하고, 1593년(선조 26) 4월에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대구의 파잠(巴岑'현재 파동)까지 출병해 왜병 2천여 명을 만나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 5월에는 울산군수 김태허와 함께 50여 명의 적의 목을 베어 당상관으로 특진하여 경주부윤으로 승진하고, 그 후에도 안강, 양산, 언양, 기장전투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1599년(선조 32) 성주목사 겸 방어사로, 1600년(선조 33)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다시 승진한 것과 이후 여러 차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면서도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같은 분이었다. 1615년(광해군 7) 돌아가시자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 홍장(弘長'1558~1598)은 1596년(선조 29) 대구부사로 있을 때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란 중 위험을 무릅쓰고 통신사로 도요토미를 만나고 돌아와 특진되었다.
비록 나무는 보지 못했지만 훌륭한 분의 유허(遺墟)를 돌아보게 되는 행운을 가졌다. 그후 모 인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어 나무가 없더라고 하였더니 이번에는 다른 문중의 종가일 것이라고 했다. 영덕군청 홈페이지를 찾아 다시 자료를 구했으나 허탕치고 다만 창수와 가까운 영해 원구리 무안 박씨 경수당 종택에 큰 향나무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겨울비가 내리고 바람조차 불었다. 그러나 출발할 즈음 예보처럼 날이 개었다.
영해장터에서 별미(別味) 물곰국으로 점심을 먹고 경수당 종택(慶壽堂 宗宅'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7호)에 도착했다. 별채에 걸린 현판 경수당은 퇴계 이황(李滉)의 수필(手筆)로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착한 일을 쌓는 집안은 경사가 넘쳐난다)과 인간오복수위선(人間五福壽爲先'사람의 다섯 가지 복 가운데 수명이 으뜸이다 )라는 뜻이라고 했다.
뒤안에 큰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24호)와 누운 소나무가 있는 것이 모 인사가 말한 곳이 틀림없었다.
경수당 종택은 박세순(朴世淳'1539~1612)이 1570년(선조 3) 99칸의 큰 규모로 지었으며 이때 울릉도에서 300년생 향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당시 배편이 순조로울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조경에 높은 식견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감히 실행할 수 없었을 대역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울릉도는 향나무 천국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본인은 물론 러시아사람들까지 벌채해가면서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산꼭대기 일부지역에만 남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1597년(선조 30) 경주 부윤인 조카 박의장이 경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치를 때 군량미가 바닥나고 군인은 물론 많은 백성들도 굶주림에 허덕였다. 이때 박세순은 보유하고 있던 양곡 800섬을 조카 박의장에게 주어 700섬은 군량미로 쓰고 나머지 100섬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조(宣祖)가 박의장에게 군마를 하사하며 치하했으나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아니라 숙부의 공이라 했다고 한다.
박세순은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했다. 벼슬이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이르렀고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2등에 녹훈되었으며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경수당가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이 어려웠던 임란 때 숙질(叔姪)이 함께 구국에 앞장선 자랑스러운 집안이다.
현재의 경수당은 1668년(현종 9)에 불타고 1713년(숙종 39) 새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은 잿더미로 변했으나 퇴계의 친필 현판만은 온전했다고 한다. 향나무의 수령이 안내판에는 700년이라고 하였으나 경수당의 건축연도를 보면 740여 년이나 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