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는 그 사람의 깊이를 보여준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철학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금융 1번지' 여의도에 있는 신영자산운용 이상진(56) 대표의 집무실에서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눈에 봐도 고이고이 모아온 애장서들인 듯했다.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책의 종류. 금융'경제 관련 서적보다 고전'인문'철학서들이 훨씬 많았다. 문리(文理) 통섭형 CEO라야 융합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단국대에서 2008년에 펴낸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16권)은 개인 사무실에 비치된 경우가 드물 겁니다. 한자 5만5천 자와 45만 단어가 담겨 있어 세계 최대 규모인데 제가 워낙 한학을 좋아하다 보니 갖게 됐습니다. 골프 대신 주말에도 독서를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가 법조계 대신 증권사를 직장으로 택한 것도 자유분방한 독서 편력 때문인 듯했다. 탁월한 성적 덕분에 누구나 선망하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고시 합격을 위해 똑같은 책을 10번, 20번씩 되풀이해 읽을 자신이 없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사학으로 경주고를 설립한 수봉(秀峯) 이규인 선생이 증조부이십니다. 선친도 평생 교육계에 몸담으셨죠. 하지만 저는 교직이나 판'검사가 별로 재미없어 보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는 국문과나 중문과 전입을 고민하기도 했고요."
대학 졸업 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던 그는 이내 증권맨으로 변신했다. 선박 수주 영업을 하다가 금융의 중요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造船)학과 등 이공계 출신이 아니라는 한계도 느꼈다.
"1980년대 후반 외국 경영전문지를 읽으면서 월스트리트 신화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저의 롤 모델(role model)로 '가치투자의 거장' 피터 린치를 꼽습니다만 당시 '정크 본드(junk bond)의 황제'라던 마이클 밀켄의 성공 스토리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죠. 어느 날 증권사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곧장 사표를 냈습니다."
2010년부터 그가 이끌고 있는 신영자산운용은 1956년 설립된 신영증권의 자회사로 1996년 출범했다. 특히 저평가된 주식에 장기 투자한다는 철학을 고수하는 '가치투자의 명가'로 유명해 5년 수익률이 전체 5위권에 든다. '신영마라톤펀드'가 대표적으로 전체 수탁고는 4조8천억원에 이른다.
"설립 당시 임원으로 참여하면서 30여 개의 미국 자산운용사를 돌아봤습니다. 결국 중소형 자산운용사의 살길은 가치투자란 결론을 얻었죠. 외형 확대보다 운용의 성과와 투자자의 수익이 우선이라는 게 저의 경영철학입니다. 개인투자자 역시 가치주에 적립식 펀드를 넣기를 권합니다."
신영자산운용이 창사 이후 15년 연속 흑자경영을 이어온 데에는 그의 풍부한 경험도 한몫했다. 국내 1세대 애널리스트'투자전략가인 그는 현장을 뛰던 시절 한 해 150곳 가까운 회사를 일일이 방문하고 분석했다. 기업의 가치를 꿰뚫어보는 예리한 시각 덕분에 외국계 증권회사에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신문사에 노련한 대기자가 필요하듯 증권업계에도 경험이 중요합니다. 후배들을 엄하게 가르치다 보니 '가가멜'이란 별명도 얻었습니다만 한우물을 파는 우직함과 성실성이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퇴직한 이후에는 우리 신라'고려'조선시대 경제를 연구하는 게 목표입니다. 신라시대 GDP가 얼마 정도였을까요?"
대구 동덕초교와 경북중'고를 졸업한 그는 인기 경제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감상과 함께 매주 토요일마다 한학동아리에 나가는 게 큰 즐거움이라고 귀띔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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