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독립군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백포 서일(1881∼1921) 평전이 출간됐다. 백포 서일은 1881년 2월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에서 출생, 고향에서 계몽운동 및 교육사업을 펼쳤다. 30세 때인 1910년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자 계몽교육운동을 접고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31세 때 그는 부친과 아내, 자식들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두만강 이북 왕청현 덕원리로 터전을 옮긴 그는 반일의병들과 대종교인이자 동지인 현천묵, 계화 등과 손잡고 항일독립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추대됐다.
이후 서일은 중광단의 중심인물들을 지도하며, 화룡현, 왕청현, 연길현으로 나누어 포교활동을 펼치는 한편 독립운동의 힘을 키웠다. 후일 대종교 전성기에는 교도가 30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일본의 집요한 탄압 속에 서일은 근거지를 옮겨 다니며, 종교활동을 펼쳤다. 1919년 3월, 왕청현에서는 서일의 지도 아래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과 각지 사립학교 학생들, 종교인들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순수 우리글 신문 '일민보'와 '신국보'를 꾸리고 무장항쟁을 고취하면서, 결사대원을 모집했는데 그 수가 1천37명이었다. 이후 서일은 북로군정서군 총재로 추대되었고, 병력 확대, 무기 장만, 핵심 군사 양성에 힘썼다. 러시아와 연해주를 드나들며 무기를 사들이는 한편 군사를 양성, 1920년 9월 사관생도를 졸업시켰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군의 이청천 부대, 안무 부대, 광복단 등 여러 부대를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가 됐다. 서일 총재의 명령으로 김좌진의 군대와 홍범도의 군대는 청산리에서 일본군 200여 명, 백운평과 천수동, 고동하, 어랑촌 등에서 일본군 1천여 명을 섬멸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전투를 펼쳐 많은 적을 사살했다.
서일은 1919년 5월 대한정의단 단장 자격으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서신을 보낸다.
'일본의 진취주의자들은 걸핏하면 섬나라는 답답해서 살 수가 없을 뿐이니 반드시 한반도를 병탄해서 대륙으로 나아가는 거점으로 한 연후에야 동양의 패권을 잡을 수 있고, 서양인이 세상에 횡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바로 시(時)를 지나치고 세(勢)를 거스르는 주장입니다. 대저 시와 세라는 것은 상(常)을 범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바로 민족평등의 시대이며, 특별히 지난날 한 사람이 횡행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조선은 오래된 나라입니다. 역사가 독립되었고, 그 종교가 독립되었으며, 언어 문자 윤리습속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라도 독립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대만이나 유구(琉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조선의) 백성이 지혜가 조금이라도 열리고 인심이 자결한다면 (일본)정부가 고심한 동화는 십수 년 내에 헛된 일로 돌아갈 뿐입니다.'
1921년 41세 때 서일은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했고, 러시아령 자유시사변으로 서일 장군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두달 후 마적들이 서일 장군이 머무는 마을을 습격해 마지막 남은 병력마저 스러졌다. 서일 총재는 그해 8월 27일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했다.
이 책은 선생의 나라사랑과 조화와 균형을 통한 번영, 민족의 화합과 통일, 인류전체의 홍익과 공생사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누란의 위기 속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역사의 길을 걸었던 거인의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462쪽, 2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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