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마음의 책] 외할머니-엄마-딸, 100년간 이어진 여인 수난사

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지음/ 한겨레 출판 펴냄

1927년 내성면 두릉골(경상북도로 추정)에서 태어난 딸 두자를 시작으로, 그녀가 낳은 쌍둥이 딸 수선과 봉순, 손녀와 손자까지 100년 동안 이어지는 여인 수난사다.

'두자는 주걱 잡는 힘이 생기면서부터 집안일을 했다. 손녀들은 산나물과 버섯을 캐고, 감자를 심고, 옥수수를 뽑고, 보리를 털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결국 남의 집년 될 것들이 집안 양식만 축낸다며 아침저녁으로 구박했다. 할머니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면서 아들과 손자의 밥그릇을 채웠다. 손녀들 몫까지 싹싹 긁어낸 양식을 손자 입속에 떠 넣으며 할머니는 어이구 내 새끼, 어이구 내 보물, 어이구 자랑스러운 내 고추야. 입이 닳도록 읊어댔다.'

딸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자라다가 시집을 갔다. 거기서 시댁 식구들의 푸대접과 남편의 폭력 속에 집안을 꾸려가야 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평생을 고통 속에 보낸다.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는 남편이 시앗을 들여도 기꺼운 얼굴로 맞이해야 한다.

남자는 몸을 함부로 굴려도 상관없고, 여자는 한 남자를 사랑하다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헤픈 여자'가 된다. 남자는 시앗을 봐도 상관없고, 여자는 시앗을 투기하거나 보살피지 않으면 나쁜 여자가 된다. 여자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녀들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남자의 소모품,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이자 일꾼으로 '익명'의 한평생을 살다가 죽는다.

문학 평론가 강유정은 "난 이 소설을 누워서 읽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버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 두자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종의 상징이다"고 말한다. 소설가 김인숙은 "최진영은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만큼의 목소리를 내 아프다고 했고, 슬프다 했고, 세상이 부당하다 했다. 이 소설은 대를 물려 이어가는 여인들의 수난사다"라고 말한다. 여성들에게 그만큼 절절하게 와 닿는 이야기라는 말일 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40대 남자 이영찬의 '이제 오후 두시일 뿐이다'는 책이 이 소설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오후 두시…'는 모아놓은 돈은 없고, 돈 쓸 일은 많은 가장, 직장과 사회에서는 무거운 역할을 강요받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의 남자들은 불투명한 미래를 예감하며 얇은 지갑과 휘청거리는 건강상태, 위태로운 가족관계를 견디며 살아간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남자들은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 쓰러질 지경이라고 푸념하고, 여자들은 대를 이어온 슬픔과 고난이 '끝나지 않았다'고 호소한다. 양쪽 모두 현재 상황을 힘들거나 부당하다고 인식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기 몫의 행복보다 더 많은 행복을 도둑질해 갔다는 말인가. 대체 누가 마땅히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을 타인에게 전가한 것일까.

딸로 태어나 서러운 세상을 살았던 많은 엄마들(현재 50대 이상의 여자들)은 '내 딸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밥도 설거지도 빨래도 시키지 않았다. 남자 아이들과 똑같이 대접했다. 공주처럼 떠받들고 죽을 힘을 다해 공부도 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자란 딸들은 '아들'이 되어 주지 않았다. 남자 아이들처럼 암묵적인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았기에 '가족 부양'의 책임의식이 희미한 것이다.

더 나쁜 것은 딸들이 아들처럼 자란 탓에 '딸의 미덕'마저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나이 40이 되어도 된장국을 끓일 줄 모르고, 요령 있게 칼질을 할 줄도 모른다. 김장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아이도 어떻게 기르는지도 모른다. 툭하면 팔자타령을 하고, 하늘이 무너져라 한숨을 쉰다. 망치질이나 삽질은 남자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설거지는 왜 여자가 해야 해?'라고 따진다.(다 그런 것은 아니다. 안팎에서 슈퍼우먼 역할을 해내느라 녹초가 될 지경인 여성도 많다. 마찬가지로 가장의 책임과 임무에는 태만하면서 권리만 누리려는 남자들도 많다.)

그러니 현대 한국사회의 부당한 면을 '성'(性) 차별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위안이 될지언정 합리적인 접근은 아닐 것이다. 저녁 지을 쌀 한 되를 얻기 위해 종일 '시궁창'을 헤집어야 하는 여성 가장이 있는가 하면, 손에 찬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여성도 있으니 말이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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