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조그마한 의상 가게를 운영하는 디자이너였을지 모릅니다."
기업 하나가 성공하는 데에는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 제품에서부터 자본과 인력, 기술력 등 많은 것들이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만 대구 대표 패션업체인 ㈜혜공은 '파트너'와 '미래전략'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회사다.
단일 패션 브랜드로 3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혜공의 업적은 김우종(56) 대표와 그의 아내 도향호(58) 감사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4일 만난 김우종 대표는 자신의 영원한 파트너를 만난 것이 성공의 밑거름이었다며 고등학교 시절 얘기부터 입을 열었다.
◆삼수생이 패션인으로
김우종 대표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자랐다. 큰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의 김 대표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교복을 입으면 맵시가 좋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나 스스로 깔끔하게 옷을 입고, 옷에 이상이 없는지 챙기면서 나름 '패션'에 대한 생각을 어렴풋이 한 것 같다."
하지만 대학 진학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던 그는 연거푸 대학시험에서 떨어지면서 삼수의 길까지 갔다. 그러던 그가 패션으로 눈을 돌린 것은 누나의 말 한마디다.
"우종아! 넌 옷 입는 감각이 좋으니 패션을 한번 배워봐, 파리에 유학도 가고 견문도 넓히면 분명히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어."
김 대표는 그 말을 듣고 '아, 이거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바로 한국복장연구원과 함께 1970년대 대구의 양대 패션인맥 양성소였던 오스카디자인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김 대표는 패션 교육을 마친 뒤 자신이 꿈꿔왔던 파리 유학을 접고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집안이 기울면서 당장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온 것. 김 대표는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가 그룹차원에서 잘못을 저질렀고 아버지가 대신해서 회사를 그만두셨다"며 "집안이 기울자 당장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직업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패션'에 대한 열정과 꿈을 접지는 않았다.
◆같은 꿈을 가진 파트너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평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만났다. 바로 아내이자 패션 브랜드 '도호'의 수석디자이너 도향호 감사다.
김 대표는 도 감사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남다른 여성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처녀시절 아내는 패션을 배우지도 않았지만 남들과 달리 세련되게 옷을 입고 다녀 패션을 배우는 나의 눈에도 특별해 보였다"며 "아내 역시 패션 디자인을 배운다는 나의 모습을 동경했다"고 말했다.
도 감사가 김 대표를 만나면서 자신도 패션의 길을 가고 싶다는 결심을 했고 둘은 함께 패션을 배우며 꿈을 키워나갔다. 김 대표가 도 감사를 아내로 맞이할 결심을 한 것은 직장생활을 시작할 즈음이다. 김 대표는 "돈을 벌기 위해 정신 차리고 직장생활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도 감사에게 '이제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더니 나에게 하는 말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일할 거야.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같이하면 더 잘 일어날 수 있잖아." 이 말에 두 사람은 평생의 연을 맺고 파트너로서의 길을 걸어갔다.
◆이름 석 자로 가게를 열다
평생의 파트너를 만난 김 대표는 1981년 대구 중구 동인동에 약 50㎡(15평)의 작은 가게를 얻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의상실'을 개업했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김 대표와 도 감사, 봉제사 이렇게 3명이 전부였다.
어려운 살림에 가게를 열었으니 힘든 일도 많았다. 김 대표는 "가게도 운 좋게 싼 가격에 얻어 겨우 열었지만 손님들의 옷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단을 살 돈이 없었다"며 "지금으로 치면 10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일명 '보따리 장사'도 했다. 일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 현장에서 원단을 정하고 치수를 측정, 가봉에서부터 마감까지 처리해 직접 전단하는 영업 방식이었다. 김 대표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K2 공군 비행장의 관사에서 장교 부인을 대상으로 옷을 만들기도 했다"며 "군사지역으로 들어갈 때마다 군인들이 우리의 물건을 일일이 확인하고 신분증을 요구하는 등 까다롭게 굴어서 긴장한 적도 많았다"고 웃음을 보였다.
작은 가게를 운영했지만 김 대표는 자신만의 경영철학을 가졌다. 김 대표는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 4년 동안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며 "새벽부터 일어나 가게를 청소하며 고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낮에는 고객을 응대하고 저녁에는 나만의 패션에 대한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기성복에 뛰어들다.
맞춤복 제작에서 김 대표는 1989년 '혜공물산'을 설립하고 기성복에 뛰어들었다. 김 대표는 "잘할 자신이 생기면서 회사를 설립했다"며 "그때 대구가 여성복으로 유명했고 이때를 틈타 지역 백화점에서 납품해 성장세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9년 뒤 김 대표는 미래에 대한 승부수를 던졌다. 고급 브랜드인 '도호'를 론칭한 것. 아내 도향호가 수석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색깔을 펼친 브랜드를 만들었다.
김 대표는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으로는 우리의 이름을 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남과 다른 디자인, 브랜드로 도전하면 오히려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운도 따랐다. '도호'를 선보인 1998년은 위환위기로 주요 의류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던 시기였다. 지역 백화점들이 빠져나간 업체들을 대신할 브랜드를 찾던 중 '도호'가 등장한 것이다. 김 대표는 "나름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덕분에 경기 영향도 적었고 성장이 꾸준했다"며 "백화점이 앞다퉈 입점을 요구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국내 백화점을 평정한 김 대표는 지난해 본격적으로 중국시장도 두드렸다. 중국 리랑그룹과 제휴해 자사 브랜드 '도호'를 중국 최상급 백화점 5곳에 입점한 것. 이에 대해 김 대표는 "10년 전부터 중국 진출을 고려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이 믿을 만한 파트너를 못 만났기 때문이다"며 "그런데 도 감사라는 멋진 파트너를 만나 혜공이 성공한 것처럼 이번 중국 진출도 좋은 파트너인 양우 회장을 만나 성공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기나긴 성공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지만 김 대표는 새해 소망으로 한 가지를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의 평생 파트너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은 도 감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만났기에 혜공이 있고 '도호'라는 브랜드가 완성될 수 있었다"며 "회사를 위해 자신을 바쳐 일한 도 감사에게 항상 고맙고, 앞으로는 회사보다 우리 부부를 위한 시간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처럼 다시 되새겼다.
노경석기자 nk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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