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오랜만에 서울에서 주말과 휴일을 보냈다. 곧 중학교에 입학하는 둘째 녀석의 서울 구경 타령 때문이었다. 모처럼 만의 가족 나들이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 청와대와 광화문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을 예약하고, 국회의사당과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도 찾아놓았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부자간의 정을 돈독하게 쌓기는커녕 다투기까지 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은 채 부모 욕심대로 일정을 잡은 탓이었다. 재미있는 서울시청 광장의 스케이트장 대신 겉보기에도 딱딱한 국회의사당을 찾고, 따뜻한 극장 대신 한겨울 칼바람 몰아치는 광화문에서 세종대왕 동상을 구경했으니….
요즘 정치권을 보면 아이들 생각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이 길이 옳은 길이다'만 외치는 못난 아빠와 일견 비슷한 것 같다. 국민이 원하는 건 뻔한데 귀 기울이지 않고, 소통 대신 설득하려고만 한다. 환골탈태할 테니 지켜봐 달라면서 속으로는 총선에서 살아남을 궁리에만 골몰하고 있다.
이런 중병(重病)은 특히 한나라당에서 더 심각해 보인다. 며칠 전 만난 한 여권 정치권 인사의 표현대로 "위암인 줄 알고 배를 갈랐더니 간암에, 폐암에, 췌장암까지 걸린 상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에 현역 의원의 비서가 연루돼 구속되고 나니 이번에는 당의 얼굴인 당 대표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폭로가 터져나왔다. 전설 속의 명의인 화타(華?), 편작(編鵲)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다.
한나라당 아니, 나라 전체가 절단 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지만 정국을 바라보는 여당 국회의원들의 심중에는 자신의 안위만 있는 듯하다. 고작 나온다는 이야기가 "한나라당 간판으로는 힘들다"거나 "당의 간판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정도다. 아예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당과의 거리 두기에 나서고 있다. 최근 내놓은 의정보고서에 당 로고를 뺀 것이다.
비록 소속은 달랐지만 1999년 작고한 고(故) 제정구 의원처럼 "국회의원 당선 횟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결기가 아쉬운 대목이다. 제 의원은 1995년 민주당의 분당 당시 "정치 발전을 위한 길이라면 의미 없는 재선, 삼선이 되기보다 초선으로 장렬히 전사하겠다"며 DJ와 갈라서 아직도 기자들 사이에 회자되곤 한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비대위도 출범부터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박 위원장은 9일 비대위 회의에서 돈 봉투 사건과 관련, "쇄신을 멈추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당내에선 반(反)비대위, 반쇄신에 대한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분위기다. 박 위원장과 경쟁 관계에 있는 일부 중진들은 아예 비대위원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지난해 어느 드라마를 통해 '이게 최선입니까?'란 유행어가 큰 인기를 모았다. 말로만 최선을 다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어리석은 유권자는 더이상 없다. 서로 등을 돌리고 '땅싸움'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식상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하다.
스스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외부에서 나서 변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작금에 벌어지는 집권 여당의 위기가 성공적인 쇄신의 계기가 될 것이란 희망 섞인 전망은 불가능에 가까운 듯하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돌려세우기에는 민심이 너무 멀리 떠나버렸다. 4월 11일 늦은 밤, 한나라당을 뒤덮을 "이게 최선이었습니까?"란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하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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