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소요당 박하담 선생과 청도 수야리 은행나무

온갖 풍상 이겨내고 하늘 향해 꼿꼿하게

청도가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이라 전원주택지로 각광받고 있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좁은 행정구역(696.53㎢)에 비해 나무 문화재도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운문사 경내의 처진소나무(제180호), 매전면의 처진소나무(제295호), 각북면의 털왕버들(제298호), 대전리의 은행나무(제301호), 적천사의 은행나무(제402호) 등 천연기념물이 5그루이고, 각북면 뚝향나무(제100호), 매전면 하평리 은행나무(제109호)등 경상북도 기념물이 2그루다.

대구시는 청도보다 넓은데도(884.15㎢) 천연기념물 1그루, 시 기념물 2그루뿐인 것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단순 비교는 공식 자료일 뿐 아직까지 문화재나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은 노거수만 해도 자계서원 내에 김일손, 칠곡에 박란, 금촌에 이계손이 심은 은행나무가 더 있을 뿐 아니라 모두 5세기 전에 심은 오래된 고목들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지난해 '청도반시'가 어떻게 해서 씨가 없으며, 토질이 비슷한 다른 곳에 심을 경우 왜 씨가 생기는지를 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결과적으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여도 결실이 잘 되는 품종이고, 이는 조선조 명종 때 평해 군수를 역임했던 박호(朴虎)가 임기를 마치고 귀향할 때 가져와 보급하게 된 감나무가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작업을 하면서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이 심은 이서면 수야리 수령 500여 년의 큰 은행나무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소요당은 아버지 박승원(朴承元)과 어머니 진주 하씨 사이에서 1479년(성종 10)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말이나 행동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동창 김준손(金駿孫)은 공을 보고 공자(孔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자공(子貢)에 비유했다고 한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량과에도 뽑혔으나 늙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했다고 한다.

그 후 눌연(訥淵) 위에 소요당을 짓고 이를 자호(自號)로 삼았으며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했다.

공이 쓴 소요당기에 '화초를 보면 조물주가 만물의 생육하는 뜻을 알게 된다'는 부분이 있다.

비록 연약하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아 꽃을 피우고 가을을 맞아 열매를 맺어 대를 잇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늘에서 자라든 바위 위에서 자라든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툭하면 남을 모함하고 질시하며 불평하는 인간이 배워야 할 지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공의 높은 학문과 올바른 행의를 알게 된 관찰사가 '백행의 근본인 효를 다하고 학문을 깊이 연구한 선비이며 숨은 인재'라고 천거하였으나 끝까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지리산의 거인 남명 조식(曺植)이 소요당을 찾아와 나라에서 세 번이나 불렀는데 왜 출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분수가 벼슬할 그릇이 못 되고, 늙은 어버이를 두고 멀리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고 스스로 겸양해 했다고 한다.

삼족당 김대유(金大有)와 사창(社倉)을 설치해 고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주도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많은 선비들이 처형되자 문집을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1560년(명종 15) 돌아가시니 향년 82세였다. 저서로 '소요당일고'가 있고 정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사림이 주선하여 매전면 운수정에 삼족당과 소요당 두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현사(鄕賢祠)라고 하였으나,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두 분의 업적에 비해 대접이 너무 소홀하다며 금천면 신지로 장소를 옮겨 선암서원(仙巖書院)을 세워 위패를 모셨다.

공의 올곧은 정신은 손자와 증손자 대에 와서 그 빛을 더 발하게 되니 임진왜란 시 박경신, 경인, 경전, 경윤, 경선, 철남, 지남, 선, 찬, 린, 우, 근, 숙, 구 등 14의사(義士)를 배출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청도는 영남대로의 통과구간이기 때문에 임란의 피해가 어느 지역보다 컸었다. 이때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공이 어린 시절을 보낸 이서면 수야리에는 직접 심은 큰 은행나무가 온갖 풍상을 이겨내고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천연기념물로도 보호수로도 지정되지 않았다.

나무 문화의 소중함을 이해 못 하는 공무원들의 무성의가 아쉽기도 하지만 후손들이라도 표석을 세워 공의 올곧은 정신을 본받는 공간으로 가꾸었으면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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