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명산인 금강산, 설악산, 지리산. 세 산에 대한 평가로 고려시대 안축(安軸)의 품평은 후대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그는 설악산을 돌아본 후 '금강은 수려하나 웅장하지 못하고(金剛秀而不雄) 지리는 웅장하나 수려하지 못하나(智異雄而不秀) 설악은 수려하고도 웅장하다(雪嶽秀而雄)'라고 평했다.
지난해 초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실시한 우수경관 평가에서도 설악산의 공룡능선이 한라산, 지리산을 제치고 1위로 올랐다. 산에 어찌 우열이 있겠냐만은 개개인의 기호(嗜好)는 있을 수 있고 인기의 총합에서 수위에 올랐다는 건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새해 새 출발 에너지 충전엔 설악 종주가 최고=산 마니아들에게 지리산, 설악산 종주는 일종의 의전(儀典) 같은 것이다. 20~40㎞에 이르는 장정(長程)은 완주 자체로 의미가 클 뿐 아니라 동호인과 마니아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많은 등산객들이 연말연시에 대간을 종주하며 상념을 씻어내고 험한 산길과 계곡을 누비며 새 출발의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설악 종주에 나선다. 마침 한 산악회에서 일출산행 스케줄이 잡혔다. 밀쳐두었던 숙제를 꺼낸 듯 근육과 신경들이 묘한 떨림으로 반응한다. 오후 10시 대구를 출발한 버스는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 새벽 3시쯤 강원도 속초시 오색에 도착했다. 오늘 코스는 오색에서 대청봉으로 올라 소청-봉정암을 거쳐 백담사로 내려가는 약 25㎞ 코스. 대청봉에서 일출을 감상하고 소청에서 공룡능선을 둘러본 후 수렴동~백담계곡을 내려오는 일정이다. 시계는 막 오전 3시를 가리키고 오색안내소에는 전국에서 밀려드는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아이젠을 장착하고 헤드랜턴을 밝힌다. 일행도 대열에 합류해 오색 능선의 급경사를 치고 오른다. 칠흑 같이 어두운 계곡. 일렬로 늘어선 불빛만이 공간을 구획하고 얼음을 할퀴는 아이젠 소리만 겨울밤의 정적을 깬다.
7부 능선을 지나자 기류의 흐름이 긴박하다. 차가운 바람은 이중 커버의 장갑까지 파고든다. 대청봉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 30분. 예정보다 30분 이상을 앞당겼다. 추위를 이겨내느라 너무 속도를 낸 탓이다. 일출까지는 1시간을 더 기다려야한다. 귓전을 때리는 칼바람, 일행은 대청봉 일출을 포기하고 중청대피소로 향했다. 대피소는 이미 등산객들로 만원을 이룬 상태. 몸을 틀어 구석자리 하나를 빌려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였다. 아침 식사를 할 무렵 동쪽이 환하게 밝아왔다. 짙은 운무를 걷어내며 새해 희망을 품은 첫해가 얼굴을 내민다. 등산객들은 마음을 모으고 이런저런 기원을 읊조린다.
◆신선봉'천화대'1275봉…공룡능선 퍼레이드에 압도=일출을 렌즈에 담고 일행은 다시 소청으로 향했다. 랜턴 불빛이 걷힌 자리에는 눈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귓전을 때리던 칼바람도 여명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소청, 희운각 갈림길에 이르자 갑자기 시야가 열렸다. 상고대 너머로 눈앞을 막아선 거대한 암릉의 도열, 공룡능선이었다. 능선의 초입 신선봉부터 '천상의 꽃밭'이라는 천화대, 수려함에서 제일로 친다는 1275봉까지 각각의 봉우리들이 퍼레이드를 이루고 있었다.
공룡의 비경을 비껴선 오른쪽으로 권금성, 화채능선, 칠성봉이 위용을 뽐내고 왼쪽으로는 서북능선에서 용아장성까지 내외 설악의 비경이 담묵 수채화로 번져간다. 소청을 지나면 길은 경사도를 뚝 떨어뜨리며 하산로를 열어 놓는다. 러셀(눈 다지기)이 잘 돼 있어 아이젠만으로 장비는 충분하다. 공사가 한창인 소청대피소를 지나 조금 진행하면 설악 최고의 기도처 봉정암이 나온다. 봉정암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선덕여왕 13년)한 사찰로 부처님의 진시사리를 봉안한 진혈처(眞穴處). 설악의 사찰, 암자뿐만 아니라 전국 5대 적멸보궁 중에서도 가장 기도발이 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암자는 세상 모든 소리를 삼키고 무음(無音) 모드로 돌려놓았다. 무채색이 대세인 산사에는 추녀에 늘어선 고드름만이 단청을 반사하며 색(色)을 비춰내고 있다. 일찍이 봉정암 등정 길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송강 정철(鄭澈)은 '설악은 구경이 아니고 고경(苦境)이요 봉정이 아니고 난정(難頂)'이라고 표현했다.
◆봉정암 사리탑 너머로 날카로운 용아장성 우뚝=절 뒤편의 석가사리탑으로 오른다. 사리탑은 기도처뿐만 아니라 전망처로도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알려진대로 봉정암은 용아장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설악 최고의 경치 중 하나로 꼽히는 이 능선은 공룡능선, 화채능선과 함께 설악 비경의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등산객들은 탑을 비껴서 펼쳐지는 암릉의 퍼레이드에 압도된다. 용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늘어선 모습에서 유래된 이 능선은 알고 보면 화강암의 1억 년 풍화작용의 결과물이다.
다시 봉정암 마당에 선다. 서북능선 쪽 연봉들이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계단을 따라 하산 길은 다시 이어진다. 인적 드문 길, 아이젠 소리만 계곡을 울린다. 길은 백운골을 지나 곡담계곡으로 이어진다. 연말 폭설, 한파 탓에 계곡은 온통 눈이다. 빙점에 노출된 물은 물살 센 소(沼)에서만 겨우 존재감을 뽐낸다. 안내도엔 이 길을 따라 쌍용, 용손, 용아 같은 폭포들이 표시돼 있지만 군데군데 우뚝 선 빙벽들에서 그 위용을 짐작할 뿐 정확한 위치를 찾기 힘들다.
수렴동대피소에 이르면 계곡은 300m대로 고도를 떨군다. 장거리 레이스에 지친 산객들은 여기서 간식을 챙긴다. 수렴동 끝 지점에서 영시암(永矢庵)과 만난다. 조선 숙종 때 문신 김창흡이 암자를 짓고 은거하던 곳이다. 당쟁에 환멸을 느낀 그는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기로 다짐하고 이름도 영시암으로 지었다.
영시암과 백담사는 차도로 통하고 도보로 30분 쯤 거리에 있다. 담(潭)이 100개나 된다는 백담사의 풍경을 감상하며 계곡을 따라간다. 이 길은 만해 한용운이 영시암~오세암~신흥사를 오갈 때 왕래하던 길이라고 한다. 현대사 격동기에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백담사. 한때 권좌에서 내몰린 전직 대통령이 칩거하기도 했다. 죄인을 청정도량에 들였다고 세간의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산이나 절은 사람을 가려서 들이지 않으니 어디까지나 '산밑'에서의 일이라 하겠다.
이로써 무박2일 설악산 종주 산행을 모두 마쳤다. 거리로는 25㎞, 시간으로는 12시간이 걸렸다. 새해 아침에 순백의 설원에 새해 소망을 맘껏 펼칠 수 있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설악 중독'이라는 작은 병도 얻어왔다. 올가을쯤 또다시 수렴동으로 들어와야 할 것 같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현재 오색~대청봉, 백담사~대청봉 구간은 개방된 상태고 비선대~천불동~대청봉 코스도 등반이 가능하다. 장수대~대승폭포 구간도 열려있다. 겨울철에는 백담사~용대리 버스는 운행되지 않는다. 출발 전에 등산로 개방 여부를 꼭 확인하도록 한다. 문의 설악산관리공단(033-636-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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