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자가 달려 있는 낱말에는 괜히 정감이 간다. 갯가, 갯벌, 갯마을, 갯내음, 갯것, 갯배 등등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다. 갯가나 바닷가나 둘 다 바다를 끼고 있다. 갯가는 뻘과 모래 속에 고동과 게가 살고 있는 동화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바닷가는 파도 치는 푸른 바다의 가장자리 해변으로 먹을 것보다는 오히려 볼 것이 많은 화폭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지난 초겨울 속초를 중심으로 한 음식여행을 떠나면서 아바이순대 마을을 꼭 들러보리라 단단히 별렀다. 이번 3박 4일 기간 중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과 먹어야 할 음식들을 날짜와 끼니 별로 꼼꼼하게 적어 두었다. 속초의 대표 음식 격인 아바이순대는 나름대로 이름이 나 유명하긴 해도 복어회, 도치탕, 도루묵구이 등 동해에서만 맛볼 수 있는 명물 음식의 위세에 눌려 셋째 날 점심 메뉴로 밀리고 말았다.
속초시 청호동에 있는 아바이순대 마을로 들어가려면 폭 30여m의 갯가 수로를 건너야 한다. 거기를 건너려면 뱃삯 200원인 갯배를 타야 한다. 갯배는 이 마을 순대에 버금가는 또 다른 명물이다. 마을 근처로 들어오면 '갯배 타는 곳'이란 플래카드가 군데군데 걸려 있다. 마침 아침부터 비가 내려 '우중 갯배'는 한결 운치가 있었다. 갯배지기 영감님은 "이거 한 번 당겨 봐, 꽤 재미가 있지"하면서 배를 끄는 쇠스랑을 넘겨준다.
아바이 마을은 속초항 안쪽 청초호를 바다와 연결시키기 위해 수로를 팔 때 퍼 올린 모래톱 위에 생겨난 마을이다. 길쭉하게 생긴 모래섬 위에 한국전쟁 때 함경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들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인 돼지순대, 오징어순대, 함흥냉면, 가자미식해 등이 소문을 타고 알려졌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순대마을이 되었다.
갯배에서 마을로 들어서자 순대 간판들은 정말 요란 찬란했다. 집집마다 '1박2일'이란 문구를 대문짝만큼이나 크게 써 붙여두고 있었다. 강호동 팀이 KBS 인기 프로인 '1박2일'을 이곳 어느 집에서 촬영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어떤 집은 유리 문짝에 호동이가 순댓국을 먹고 있는 사진을 교묘하게 붙여 마치 이집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눈속임을 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웃기는 것은 '1박2일 출연진이 먹던 그 맛' '1박2일 방영' '1박2일 촬영장소 아바이 마을' 등등 어느 누구라도 시비를 걸 수 없도록 온갖 말장난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을 입구 건어물 전에서 아바이순대 마을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어느 식당이 진짜 맛있는 순대를 만듭니까." "모두 똑같아요. 요즘은 공장에서 순대를 만들어 일괄 공급하기 때문에 어느 집을 가도 그 맛이 그 맛이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수제품 순대는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요. 청초호 옆에 한 집이 있었는데 요즘도 만들라나 모르겠네요." 맛있는 순댓국에 밥 한술 말아 먹기는 틀렸나 보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르쳐 준 대로 물어물어 '원조 순댓집'을 찾아갔다. "순대는 없어요." 이미 그 집은 전문 젓갈집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있었다. 더 이상 아바이 마을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도 온 김에 맛이나 보자"고 하기에 2만원어치를 사들고 "아바이 안녕"하며 손 흔들고 돌아섰다.
맛은 정성이 좌우하며 특히 겨울 음식은 온기가 맛을 지배한다. 정성과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일괄공급 공장순대'를 먹어본들 그걸 맛깔스런 음식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도반들은 저마다 맛 사냥꾼임을 자처하는 고수들인데 공장순대에 배신을 당해도 톡톡히 당한 셈이 되고 말았다.
만드는 정성과 방금 익혀낸 온기가 없는 순대를 먹느니 차라리 얼음이 둥둥 떠있는 동치미 국물에 만 막국수 한 그릇을 뒤집어쓰는 게 오히려 후련할 것 같았다. "물치항 쪽으로 내려가 막국수나 먹는 게 어때." "좋지, 좋고말고." 이냉치냉(以冷治冷)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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