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있게 마련이다. 더러는 나쁜 추억도 있지만 대개는 아름다운 추억이 더 많다. 나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이고 속칭 '이금실'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정략 장군을 역임한 황귀성 공이 난을 피해 풍산에서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온 후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은 평해 황씨가 약 60여 호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병산서원 바로 앞 낙동강을 건너 2㎞ 정도 가면 내 고향마을이 나온다.
1968년 고향마을에서 4㎞ 떨어진 화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안동시내에 들어왔을 때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도 초등학교 6학년 때면 과외 비슷한 것이 있어서 학생들이 방과 후에 밤까지 학교에 남아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특별지도를 받았다. 그런데 우리 초등학교에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방과 후에 특별지도를 받지 못하였다. 50여 명의 졸업생 중 3명이 안동중학교에 응시를 하였지만 모두 낙방을 하고 2차로 안동 경덕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좁은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넓은 풍산들을 가로질러 안동으로 유학을 간 것은 그 당시 나로서 큰 발전이었다. 어린 모가 물에 동동 떠서 살려고 발버둥치듯이 중학교 때 안동이라는 낯선 도시에 와서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를 하면서 생존하는 방법을 배웠다. 열서너 살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매달 쌀자루와 반찬통을 짊어지고,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 풍산들의 바람을 맞아가면서 통학을 한 것이 나중에는 자립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심정을 산문으로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시의 운율을 따라 지어보면 다음과 같다.
누가 풍산을 시골이라 하는가.
내 어릴 적 풍산은 도회의 상징,
안동통에서 뽀얀 먼지 날리며
비포장길을 달려오는 시외버스,
운전석 앞에 번쩍거리는 금속판을 붙이고
버스정류장에 다가오는 시외버스는
외계에서 온 인공위성 마냥
나에겐 꿈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길의 시작은 풍산이었고,
귀향길의 종착역도 풍산이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오뉴월
어머니 졸라 풍산장터 가는 날,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 병산서원을 돌아
언덕을 올라서면 아스라이 펼쳐지는 풍산들과 학가산,
아득한 절벽 위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가고
또 한 시간 남짓 들판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난 그때 풍산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들로 생각했다.
쪽배기집과 함석집을 지나면
드디어 풍산읍에 이르는데
돌문 밖에 있던 풍산국민학교는 왜 그리도 컸던지.
우리 화남국민학교 열 배는 되는 듯.
저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걸어서 몇 분도 안 되는 거리에 저렇게 큰 학교에 다니니.
집에서부터 두 시간 남짓 땡볕에 걸어 장터에 도달하면
어머니가 장터에 오시면 늘 들르는 가게로 간다.
수많은 사람이 붐비는 노점에
기화요물로 넋이 나가 고개를 기웃거린다.
어쩌다 어머니가 박하향 아이스케이크 하나를 사주면
이국적이고 감미로운 맛에 마냥 즐거워했다.
갑자기 읍사무소에서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우리 학교 마이크 소리 백배는 더 되는 듯
점심때가 됐음을 알리는 소리이니
돌문 안 식당에서 장터국수 한 그릇 시켜먹고,
장보따리에서 노란 참외 한 개를 꺼내
깎아 먹으면 점심은 끝이었다.
참외 속살은 더욱 맛있었다.
말랑말랑한 진한 액체는
유년의 엄마 젖처럼 안식을 주었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쉬웠다.
난 이 편리한 도회에 언제 살아 보려나.
아이스케이크, 찐빵, 사탕 실컷 먹을 수 있는 세상은 언제 오려나.
눈깔사탕을 입에 물고 땅콩이 나올 때까지 빨면서 돌아오지만,
장터에서 사먹었던 짜릿한 얼음과자의 맛은 내내 아른거린다.
어른들이 쪽배기 집에서 막걸리 사발을 돌리면서
오늘 고춧값은 내렸네, 마늘값은 올랐네 하며 장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린 앞마당에서 동전으로 삼치기를 하였다.
좀 더 커서 중학교에 다닐 무렵
풍산은 이제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도전해야 할 하나의 터전으로 변하였다.
강아지풀 뜯어 코에 대고 어머니 따라 장터 갔던 길을
이젠 쌀자루 속에 고추장 단지 넣어 둘러메고
형이나 아우와 같이 힘들게 가야 한다.
풍산들 한가운데 길을 막고 있는 개울에 물이 넘치는 날이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중리나 소산으로 둘러가야 한다.
길목을 지키고 있는 불량 청소년도 우리를 괴롭힌다.
이제 풍산은 어머니 따라 소풍 가는 곳이 아니라
학업의 현장, 안동을 가기 위한 정거장일 뿐이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안동에 처음 갔을 때,
초등학교 시절 풍산만큼 큰 감동을 주진 못했다.
중학생 때부터 자취를 하며 공부해야 했던
나의 고단했던 기억 때문인가.
풍산은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샘처럼 솟아나는 곳이다.
나의 고향 이금실의 행정구역은 풍천면이지만 실제 생활권은 풍산읍이었다. 장보기도 풍산읍에서 하고 시외버스를 타도 풍산읍에 가야 하였다. 그러다가 1994년경 중앙고속도로가 생기고 일직면에 남안동IC가 생겨나자 이제는 일직면과 가깝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경 신도청 소재지가 풍천면 일원으로 발표되자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풍천면 소속으로 각인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그동안 행정구역도 안동군에서 안동시로 변경되었고 모교인 화남초등학교는 농어촌 인구의 감소로 1994년 제45회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고향에 술도가가 있었고, 학교가 있었고, 구멍가게가 있었고, 아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없어지고 고향에 가면 노인분들과 동구 밖에 있는 500년 된 느티나무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
우리 고향마을에는 총무처 장관과 마지막 관선 경북도지사를 역임한 심우영 씨가 저명한 인물이다. 그분이 1970년대 초반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나자 마을에서는 경사가 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젊은이들이 행정고시와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요즈음은 사법시험 합격생들이 많아 웬만한 시골마을에도 사법시험 합격자가 나오지만, 그 당시 시골마을에서 고시 합격자가 나온다는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었다. 1974년 형님이 50명을 선발하는 제15회 행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하게 되었고, 뒤를 이어서 나도 1980년 140명을 선발하는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이에 질세라 동생도 2003년 제4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한 집안에 3형제 고시합격의 행운을 얻게 되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익양서당에서 공부를 한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서당은 마을과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고, 사람이 평소 거처하지 않고 비어 있었던 건물이었는데, 그곳에서 밤낮을 공부하니, 젊은 청년이 강단이 있다고 하였다. 여름방학이면 남녀 대학생이 농촌 봉사활동을 나와 우리 서당에 여장을 풀고 묶고 가기도 하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3년 동안 군법무관 생활을 한 끝에 1985년 판사로 임관해 22년 동안 판사로 근무하다가 2006년 2월에 마지막 임지인 대구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게 되었다. 이제 고향에 빚을 너무 많이 져 고향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고향에 가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다. 내가 공부하던 서당은 담장이 다 허물어져 보수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마을 이장이나 어른들은 그 서당을 안동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정부의 보조로 보수를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변호사인 내가 남의 일은 변호해 주면서 정작 내 고향 일은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10여년 더 변호사로 일하고 난 다음 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금 살고 있는 대구에서 수입에는 신경쓰지 않고 소일하듯 변호사 일로 연명하고 있을까. 아니면 고향에 돌아와 별장 비슷한 건물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을까. 과거에는 막연한 고민이었는데, 지금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황현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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