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애월(涯月) 혹은(서안나)

애월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서정적이면서도 환상적인 감각의 시들을 보여주는 서안나 시인의 작품입니다. 제주도가 고향인 시인은 지금 제주 서녘 애월의 밤에 홀려 있네요.

시인에게 애월을 한마디로 불러보라 했더니 '문장!'이라 하네요. 그래서 밤의 애월이 '검은 문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문장은 단순한 줄글이 아니라 고귀한 정신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사랑이란 애월에 오면 비루해질 수밖에요. 당연히 우리의 귀는 당신 따위의 목소리는 들을 수도 없는 썩은 귀가 되어 버리고 말지요.

그 드높은 정신이 '달빛과 달빛으로 겹쳐지는 어금니'처럼 몰려오니, 우리 인간이란 짐승처럼 달아날수밖에요. 그렇지요, 절경만큼 인간을 좌절시키는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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