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강 물레길] ④ '소통과 사교의 공간' 부강정

안동∼부산 물길 거점, 선비들 선유문화로 섞사귀다

낙동강과 지류인 금호강 합류지점에 위치한 부강정은 조선시대 윤대승이 건립한 정자였다. 낙동강 물자와 생활정보가 전달되는 소통 공간이자 특히 선비들의 사교 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나 400여년의 역사속에 자취는 사라지고 현재 마을만 남아 있다.
낙동강과 지류인 금호강 합류지점에 위치한 부강정은 조선시대 윤대승이 건립한 정자였다. 낙동강 물자와 생활정보가 전달되는 소통 공간이자 특히 선비들의 사교 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나 400여년의 역사속에 자취는 사라지고 현재 마을만 남아 있다.
부강정은 장장 1천 리가 넘는 낙동강을 근원으로 하는 유역 중에서도 선유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 피운 곳으로 주목 받고 있다.
부강정은 장장 1천 리가 넘는 낙동강을 근원으로 하는 유역 중에서도 선유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 피운 곳으로 주목 받고 있다.

달성의 하빈~구지를 잇는 140리의 낙동강은 영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학술과 문화, 정보가 유통되는 소통 공간이었다. 16세기 이후 사림파의 성장과 더불어 낙동강은 이른바 강의 주변 문화와 접목돼 풍광 좋은 곳곳에 누정(樓亭)들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영남선비들의 학술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달성 하빈의 하목정, 다사의 부강정, 구지의 도동서원 등은 수려한 경관으로 예안~안동~상주~인동~성주~달성~고령~창녕~함안~밀양~김해~부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여느 누정보다 뱃놀이문화(船遊文化)가 꽃을 피웠다.

사학자들에 따르면 한 사료에 조선 인조가 내탕고를 열어 은자(銀子) 200냥을 보조하고 어필까지 내린 하목정(霞鶩亭)을 뒤로 하고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바로 코밑에서 부강정(浮江亭)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부강정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400여 년의 역사 속에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범람하는 강물에 휩쓸려 갔는지에 대한 기록조차 묘연하다. 현재 부강정으로 추정되는 터에는 마을이 들어서고 길만 나 있을 뿐이다.

낙동강 연안인 달성 하빈현 하산에 있었던 부강정은 윤대승(尹大承)이 건립한 정자였다. 윤대승은 성주 사람으로 1564(명종19년)에 생원에 입격했을 뿐 크게 드러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1577년(선조10년) 외선조 심의(沈義)의 유고인'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를 편찬하고, 간행을 위해 김극일(金克一)'권응인(權應仁)에게 감수를 부탁할 만큼 글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한다.

부강정은 낙동강과 지류인 금호강(伊川)의 합류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본래 신라 왕이 놀던 곳으로 임진왜란 전까지만해도 정자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심겨 있었다고 한다. 두 강에 접하고 노송에 에워싸인 부강정의 아름다운 경관은 문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송계 권응인은 부강정을 두고"사방에 장애물이 없어 바람을 타고 하늘을 자유로이 훨훨 나는 기사(騎士)의 기세고/ 또한 칼을 집고 엄연히 선 장부의 늠름한 모습과도 같고/ 하늘을 가르는 듯한 그 장대한 기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떨게하고/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누구에게도 굽힐 수 없는 무리같다"고 했다.

그러나 부강정은 임진왜란 때 크게 파손됐고 정자 주인마저 사망함으로써 예전의 화려함도 일시에 사라지게 된다. 1601년 3월 서사원의 완락재(玩樂齋) 낙성을 기념해 장현광'이천배 등 거유 23명과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던 여대로(呂大老)는 부강정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땅거미가 지자 배를 부강정에 댔다. 정자는 곧 상사(上舍) 윤대승이 지은 것이다. 용마루 기와는 병자호란 때 불에 탔는데, 상사가 죽은 지 채 10년도 되기 전이었다. 황량한 대(臺)는 홀로 저녁비 속에 머물러 있고, 소나무와 국화의 그림자가 빈 뜰에 얽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산양(山陽)의 감회를 일으키게 했다. 강촌에 어둠이 찾아와 정사에 들어가 쉬었는데, 방이 몇 칸에 지나지 않아 일행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 나와 사빈(士彬'李奎文)은 학가(學可'李宗文)의 집으로 돌아가 잤다.-

이후 부강정은 이지화(李之華)라는 새로운 주인을 맞아 점차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아 가게 된다. 이지화는 하목정을 세운 이종문의 아들이다. 전의 이씨인 이지화(1588-1666)는 1613년 문과에 합격해 병조'예조참의를 지내는 등 비교적 현달했던 인물이었고, 정구'장현광과 사우관계를 맺었다.

원래 그의 선대는 경기 부평에 세거하다 증조 이필(李佖) 대에 달성으로 내려왔고 조부 이경두(李慶斗)는 임란 당시 곽재우의 의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지화가 부강정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혼맥과 관련이 있었다. 조부 이경두는 파평 윤씨 윤황(尹滉)의 딸과 혼인했는데 윤황은 부강정의 창건자 윤대승의 아버지다.

결국 부강정은 지화의 아버지 이종문 외가의 정자였던 것이다. 윤씨가의 부강정 터를 인수한 이지화는 정자를 화려하게 중수한 뒤 부강거사(浮江居士)로 이름하여 이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알리게 된다.

이지화가 언제 부강정을 중수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병자호란(1636)을 전후한 시기로 추측된다. 부강정에 대한 이지화의 애정은 특별했다. 상량문'기문 등 중수와 관련된 주요 문장들을 이식(李植)'이민구(李敏求) 등 당시 조선 문단의 거장들에게 부탁한 것부터가 그랬다.

이식의 '부강정상량문'은 경관의 아름다움, 새로운 주인을 맞은 것에 대한 축하, 그곳에서 신선처럼 살아갔으면 하는 정자의 주인에 대한 당부가 잘 녹아 있고, 그런 감회와 당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팔공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멀리 대륙의 언덕이 펼쳐지고, 낙동강 물은 남쪽으로 흘러내려 금호나루에서 합류한다. 그 가운데에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선 지주(砥柱)처럼 푸른 산이 둥글게 서 있다. 그곳에 일찍부터 화려한 정자가 있어 마치 뗏목을 타고 은하에 올라간 것과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 터가 오래도록 방치된 채 매몰되어 왔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그 이름만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태평한 시대나 어지러운 시대나 그 땅은 항상 열려 있었건마는, 그곳에서 주인 노릇을 하거나 손님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야성(冶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음(山陰)의 별장이 있고, 낙수(洛水) 물가의 전원으로 물러나 반령(潘令)이 살았던 것처럼, 이곳에다 새로 정자를 짓고서 다시 명승의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또 이식은 '부강정'이라는 시에서도 구구절절 찬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두 강물이 에워싼 평평한 작은 언덕(二江環合小洲平)

유람선 가로 비껴 띄운 듯한 정자로세(亭勢眞成畫舫橫)

산봉우리 들쭉날쭉 앉은 자리 문안 오고(列岫參差來几席)

푸른 물결 넘실넘실 처마 기둥 일렁이네(滄波滉漾動簷楹)

삼신산(三神山)의 선경이 여기에서 그리 멀까(方壺靈境知非遠)

인끈 찬 명예 역시 가볍게 볼 만한 걸(絓組榮名直可輕)

강해의 흥취 저버린 지 오래인 늙은 이몸(老我已孤江海興)

누워서 노니는 정 시로나 끄적일 수밖에(新題謾寫臥遊情)

부강정에 대한 찬사는 이민구의 기문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었다. 이지화는 중수한 정자와 주변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이민구에게 기문을 청하였고, 이를 본 이민구는 하빈 일대 낙동강 연안에 소재한 10여 누정 중에서 부강정을 으뜸으로 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이종문의 아들 지화가 부강정의 중건을 주관했다는 사실을 이민구의 기문에서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초간 권문해(權文海)는 대구부사로 재직 당시의 초간일기에서'맑은날씨다.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하빈현으로 이동하여 하동'하북'하서의 각 마을에 구제품을 두루 나눠주고 부강정으로 향하니 이미 어둠이 짙어졌다. 부강정의 주인은 윤효언(尹孝彦)인데 그곳에 들렀다"고 적었다.

이지화가 부강정을 중수하고 400여 년이 흐른 지금 부강정의 와당 하나라도 그 흔적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온갖 병화와 세월의 풍수해를 수없이 거치면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지만 부강정은 장장 1천 리가 넘는 낙동강을 근원으로 하는 유역 중에서도 선유문화(船遊文化)를 가장 화려하게 꽃 피운 곳으로 주목받으면서 이제 또다시 새로운 차원에서의 문화유산을 잉태할 싱싱한 씨앗이 되고 있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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