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고라니

호랑이의 그림자라도 본 듯

검은 바위 뒤로 튀어 제 그림자를 숨긴다.

숨어 지내는 수치의 낮이 바위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것들은, 늘 어둠 속에 서식하는 것 같다.

언제나 혼자 숨어 있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내다보지만,

사람들의 그물눈이 너무 밝아 그 송곳니가 속수무책이다.

 

산길 건너는 고라니에 놀라 급정거하면

고라니는 전조등 불빛에 캄캄해져 허둥지둥 숲의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고라니의 길이 급하게 굽었다 펴짐이 느껴진다.

 

그런 느낌은 언제든 설레며 있기 마련이다.

비 오는 날 산 밑에서 고라니 울음소리를 들을 때도 그러하다.

내가 놓친 어둠 덩어리가 제 삶을 부는 소리.

제 어둠을 파헤쳐놓고서 부르는 소리.

그 소리는 우리 동네를 흔들지만,

산골짝 흘러내리는 물소리 건너 편 자글대는 어둠 속으로만 잦아든다.

놓친 어둠을 짚어 그 개울까지 나가보지만,

낯선 길 다시 부닥칠까봐 멈칫, 멈칫한다.

  이 하 석

 

물질문명의 위기를 선지자처럼 시적으로 진단한 바 있는 이하석 시인의 작품입니다. 지금 시인은 자동차의 밝은 불빛에 오히려 더 캄캄해진 고라니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길이 고라니의 길을 가로지르면 고라니의 길은 한순간 흐트러졌다가 다시 제 자리로 펴지겠지요. 시인은 그 안도감을 설렘이라 부르네요. 문명의 불빛에 밀려 고라니의 길은 어둠의 세계로만 구겨져 있지요.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동네를 흔들어도 휘황찬란한 세계에서는 아무도 그걸 수신할 귀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 소리는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우리는 그 어둠의 세계가 너무 낯설어 멈칫 멈칫 다가설 수 없지요. 우린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 아닐까, 시인이 묻고 있네요.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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