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국민의 종이라고 한다. 국민도 그렇게 믿고 있고 정치인도 그렇게 자임한다. 선거로 뽑혔으니 뽑아준 사람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여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정치인이 말 그대로 자기 머리는 비운 채 유권자의 뜻만 충실히 좇는 종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국민에게도 국가에도 비극이다. 그 생생한 예가 아르헨티나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세계 수위권의 부국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부가 얼마나 거대했던지 1946년 2월 집권한 후안 페론 대통령은 중앙은행을 방문하고는 이렇게 탄성을 내뱉었다. "금이 이렇게나 많다니! 통로를 뚫고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구나." 그러나 이렇게 많은 준비금도 퍼주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불과 6년 만에 그 많던 금은 모두 사라지고 나라에서 자본의 씨는 말라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국가 경제의 안정에 관심을 둔 집단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은 위정자대로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퍼주기에 여념이 없었고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제 몫 챙기기에 혈안이었다. 버는 사람은 적은데 쓰는 사람은 많은 이 '기생 국가'가 이후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우리가 잘 아는 그대로다.
새해 벽두부터 복지 경쟁에 돌입한 여야를 보면 우리도 아르헨티나 꼴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총선과 대선 일정이 다가올수록 여야의 복지 경쟁은 더욱 격해질 것이다. 그 양상은 전면적 무상복지로의 무한 수렴이 될 것이다. 매달 날라 오는 각종 고지서에 골치가 아프고 자식들 교육비에 등골이 휠 지경인 서민들로서는 참으로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찜찜하다. 애 키우고 밥 먹이고 병원 가는데 국가가 대신 돈을 내준다는데 그러면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여야 모두 입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 국가가 대신 내주는 돈의 원천은 세금이다. 세금을 더 걷지 않고서는 여야가 내놓은 복지 대책을 시행할 수가 없다. 불요불급한 국가사업을 줄이고 재정의 낭비적 요소를 개선하는 것으로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고?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은 피차 아는 사실 아닌가?
또 하나! 세금을 더 걷으려면 성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경제연구원의 추산에 따르면 우리의 잠재성장률은 3%대로 내려앉았다. 그만큼 우리 경제의 고용흡수력도 낮아져 버는 사람은 적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상태에서 전면적 복지라는 것은 버는 사람은 적은데 쓰는 사람은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 괴리를 메우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빚을 내거나 돈을 찍어내거나.
복지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딜레마-저출산'고령화, 빈부격차와 양극화, 승자 독식과 기회 균등의 상실-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지는 지금보다 더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비용은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정치권은 국민에게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그것이 어렵다면 세금을 더 낼 각오를 하라는 말은 해야 한다.(그렇게 하면 무상복지가 아니게 되지만) 이도 저도 싫다면 성장률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묘수를 내놓든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전면적 무상복지를 얘기하면서 재원 대책은 함구하는 것은 정치 모리배의 대국민 기만극이요. 매국 행위다. 그런 점에서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가 177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했던 연설이 천둥소리처럼 오늘에 울린다.
"저는 여러분의 대리인이 아니라 대표자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뽑아준 국회의원이 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저의 의무는 여러분의 눈치를 보면서 저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굽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뽑아주신 대표자인 국회의원은 바로 그 자신의 판단과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곳 브리스톨(버크의 지역구)의 성원으로서 저를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 성원으로서 뽑으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국익 전체를 해치는 정책을 선호하신다면 저는 마땅히 여러분의 의견에 반대하게 될 것입니다."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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