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들은 전인적 지식인에 가깝다. 시와 그림에 능하고 자연과학이나 의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자신들의 철학에 부합하는 집을 직접 설계하여 지었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가 조선시대 이름난 선비들의 집을 찾아 집주인의 철학과 건축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함성호가 글을 쓰고 유동영이 사진을 찍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이 그것이다.
경남 함양 산천재 마루 위 벽에는 중국 요임금이 권하는 왕의 자리도 마다하고 산속에 들어가 지냈다는 허유의 고사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사화의 시대인 16세기를 살면서 혼탁한 정치판에서 물러나 은둔을 택했던 처사형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남명은 출사를 포기하고 산천재에서 한평생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며 살았다. 남명은 자신이 살았던 지역을 자신의 이상에 맞게 개혁해 나갔으며, 임진왜란을 맞아 그의 문하에서 유난히 많은 의병장들이 나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남명을 노장사상의 가장 깊이 있는 학문적 계승자로 보기도 한다.
"조선의 건축을 얘기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자연과 건물이 한 몸을 이루는 통합적 인식이다. 산천재의 배치는 철저히 이 개념에 따르고 있다. 남명은 산천재를 지리산 전체와 연결하고 그 상징성을 천왕봉에 두었다. 산천재는 지리산과 노장적 세계 상호 간의 은유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의 집들은 여름엔 햇빛을 차단하고 겨울엔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하지와 동지 때 태양의 남중고도를 정밀히 계산해서 처마 깊이를 계산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처마가 길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방 안은 더 어두워진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마당에 반사된 빛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조명을 대신하는 방법이었다. 저자는 산천재에서 빛을 활용하는 우리 옛집의 놀랄 만한 환경공학적 설계에 감탄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건축물을 남긴 철학자인 퇴계는 집을 지을 때 그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건축 조영에 적용시켰고, 직접 설계도를 그리는 등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다.
"퇴계는 건축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의 이성과 합일하는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려 했다. 도산서당은 가장 완숙한 한 철학자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현실적 장소로 동양철학의 정원이라 불릴 만하다. 산과 물을 거느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도산서당의 자리는 강안의 절벽 위에 자리해서 그 풍경이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이(理)의 체(體)로서 용(用)의 형상을 바라보는 퇴계 철학의 상징적인 좌향이 아닐 수 없다."
유독 매화를 사랑했기에 추운 날씨에도 정원에서 매화를 완상하기 위해 난방이 되는 의자를 디자인하기까지 했다는 퇴계. 저자는 그의 실용에 대한 의지에서, 이후 영남의 사림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오는 실사구시의 학풍을 엿본다. 또한 퇴계의 건축관이 영남사림의 건축물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생각해볼 때, 퇴계의 도학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 16세기 조선의 현실 세계에 깊숙이 스며든 시대정신을 일궈냈다고 본다.
고산 윤선도는 가사문학의 대가일 뿐 아니라, 바닷길을 이용하고 간척 사업을 벌이며, 도시계획을 하고, 기계를 개발하여 활용한 실용정신의 소유자였다. 문학,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통달했던 고산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당쟁에 휘말려 풍운이 그칠 날 없었다. 너무도 완고한 현실 앞에서 그의 선배들이 꿈꾸었던 성리학적 이상은 그에게 너무도 허약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때가 아니면 물러서서 기다린다는 식의 성리학적인 은둔이 아니라 그 스스로 보길도에 도학의 이상향을 만들고 거기로 망명해 버린, 당대를 과거로 만든 고독한 은둔자였다. 고산은 풍수지리로 부용동의 지세를 잡고 음양오행으로 세연정의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건축을 통해 풍수지리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다. 부용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로 대변된다. 세연정은 계류의 상류에서 하류로 이어지는 세연지와 인공적인 방지 형태인 회수담, 두 연못 가운데 있다. 이 정원은 도가의 이상향으로서의 수미산을 상징한다. 우리 옛집을 통해 보는 조선 선비의 삶과 철학이 흥미롭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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