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에는 몇 가지만 적혀 있다. 오로지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들 뿐이다. 그중에 하나가 해남 대둔사 자락의 유선여관에서 눈 오는 하룻밤을 유숙하는 것이다.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지만 요즘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라'는 말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파고드는 모양이다. 그 리스트에는 세계일주, 사장 면전에 사표 던지기 등이 좋은 점수를 얻고 있지만 이뤄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새해 들어 '눈이 올 것 같다'는 뉴스를 듣고 다섯 도반들이 해남 쪽으로 출발했다. 우리 기상대는 갑자기 내리는 폭우를 예측하기는 어둔하지만 '눈이 오겠다'는 예보쯤은 쉽게 짚어내나 보다. 오후 들어 하늘이 서서히 내려앉더니 약한 눈발이 슬슬 날리기 시작했다.
유선여관의 1만원짜리 정식은 별다른 특색은 없어도 병어조림, 매생이 국, 톳 무침 등 남도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먹을 만했다. 그런데 방들은 방한은 물론 방음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문풍지 없는 문틈으로 찬바람과 함께 옆방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연인들의 옆방을 차지했더라면 소리사냥 하느라 밤을 지새웠을 텐데 역시 운은 따라 주지 않았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그야말로 산소였다. 초저녁 하늘에는 섣달 보름을 사흘 앞둔 둥근 달이 큰별 하나를 데리고 높이 떠있었다. 다리 밑 너부내 개울가에서는 두 도반들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들어가서 소주나 한잔 하지." 찬반을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좋지."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마려운 통을 비우러 밖으로 나오니 그새 세상은 온통 설국으로 변해 있었다. 앞산을 쳐다보니 수묵 산수화가 연폭 병풍으로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2개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화폭 가득 노란 색깔을 칠한 칸딘스키의 '인상Ⅲ'(ImpressionⅢ)란 추상화였다. 다른 하나는 눈 내리는 밤이면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던 백석(白石)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였다.
'인상Ⅲ'란 그림의 부제는 '콘서트'다. 그는 친구의 콘서트에서 들었던 음악, 즉 소리의 감흥을 이렇게 캔버스 가득 노랑으로 칠한 것이다. 다만 그림 속에 드러나는 부분은 검게 칠한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과 아무렇게나 그린 청중 몇 사람의 실루엣뿐이다.
칸딘스키에게는 음악이 그림의 영감이었고 그 소리의 인상이 바로 노란색 바탕의 '콘서트'였던 것이다. 유행 가요는 가사가 뜻을 전달하지만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노랫말이 없다. 대신에 다양한 음색의 악기들이 저마다 소리를 내어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칸딘스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스노 콘서트'를 감상했다면 그 이미지를 어떤 색깔로 표현했을까.
나는 지금 스노 콘서트가 들려주는 소리의 향연에 취해 열려 있는 마음의 귀(心耳)를 닫지 못하고 있다. 그 음악 속엔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눈사태가 굉음을 일으키며 쏟아지기도 한다. 어느 누가 감히 함박눈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는가.
오늘처럼 눈 내리는 밤에는 꽁꽁 언 동치미 국물에 만 메밀국수를 안주로 찬 소주나 실컷 마셨으면 좋겠다. 이미 소주는 한 방울도 없다. 문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외풍 센 방에 누워 백석의 시를 읊으며 다시 잠을 청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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