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일상이 무거우면 절실해지는

얼마 전 세미나가 있던 날 미술 비평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전업 작가로 사는 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대뜸 "'이 땅에서'라고 단서를 달아봐. 그래야 더 절실하지!" 하고 '이 땅'을 뜬금없이 강조한다.

질문은 다시 '이 땅에서 전업 작가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로 수정되었다. 친구는 이런 질문은 승산 없는 위선 정도로 생각했는지, 확고한 선을 그으며 한 방 더 날린다. "전업 작가? 그거 슬픈 거다"라고 잘라 말한다. 뻔뻔하고 한편으론 시원하다. "그래, 우아한 설교보다 좋다고 하지." 정직한 고해라도 받은 기분이다. 그는 "주어가 뭐"냐고 되레 묻는다. '나를 포함한 불특정 다수' 하고 대화는 짧게 끝났다.

남재일이 쓴 영화 평론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 기억이 있다. '입을 닫고 몸만 열어라!'는 창녀의 정체성을 도덕적 악의 은유로, 사회로부터 오직 한 가지 명령만 받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나는 그 문구를 '주둥이는 닥치고 작업만 하라!'는 시시껄렁한 말로 전업 작가의 정체성과 동일시해 왔다. 가끔 젊은 작가들이 불투명한 현실과 미래를 절실히 호소해 오면 애써 무시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외쳐대는 것도 슬그머니 말꼬리를 접어야 할 것 같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전화기를 놓고 잠시 생각했다. 이 땅에서 한눈팔지 않고 붓질하기가 슬프다는 친구의 야유는 '이 땅'에 방점을 찍은 것 같지만 사실은 '슬프다'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쓸쓸한 풍경이다.

그렇다. 어쩌면 그림만 그려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은 어느덧 무능이란 낙인을 찍는 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슬픔'의 함의와 냉혹한 현실의 혐의가 계속 슬퍼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들의 욕망과 상처가 내통한 결과는 힘겹다.

그러니 현재는 고단하고 현실은 가난을 가불해서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안이 증폭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불안은 젊은 작가든, 경력이 많은 작가든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들 주위를 불길하게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그 또한 걱정할 필요는 없다. 8월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폭염과 12월 삭풍이 불어대는 강추위를 허허벌판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보낸다는 건 실로 위대한 일이다. 경험상, 어떤 결핍의 힘은 절실함이나 낯선 방법론을 자연스레 가져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절박함은 낯선 곳으로 이어지고, 개인전이 끝날 무렵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음악을 크게 틀어도, 어떤 일을 해도, 에너지는 '멈춤'에서 작동하지 않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아마 '도망 중'이라는 표제가 생긴 이후 여행지를 스스로의 유배지로 삼는 일이 빈번해진 까닭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도망은 나의 발길을 낯선 여행지로 재촉한다.

문명사회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돈으로 사야 하는 슬픔을 회피해 볼 요량으로 오지에 칩거한다든지, 여행지의 쓸쓸하고 낡은 방에서 절묘한 분위기의 음악을 듣는 경험들도 따지고 보면 모든 게 결핍이나 어떤 모종의 절실함이 몰고 온 낯선 그 무엇들이다. 나는 어느덧 '낯선 그 무엇'을 즐기고 있다.

어쨌든 그런 무거운 절실함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이런 체념에서 좀 더 성숙한 샛길로 진화(?)하기도 하니 말이다.

'오 슬퍼라, 여기 괴로워하는 마음이 떨고 있네! 그 마음 얼마나 무겁고, 그의 얼굴은 어찌나 창백했는지!'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나오는 괴로운 마음과, 창백한 얼굴의 시적 슬픔들이다. 이것을 두고 시인 김갑수는 인생으로 속화시켜 '잠시 나의 번민을 재워주는 달콤한 잠의 쾌감 같은 것'이라고 했고, 작가 위화는 '거대한 장중함 위에 가벼움을 실은'이라 했다. 하하 나는 일상이 무거워 도망치는데….

권기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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