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30)노명옥 소설가의 김해시 상동면 감로

낙동강, 어른들 홍수걱정 아랑곳 않은 꼬맹이들 사시사철 놀이터

내고향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넓은 강폭과 주변 산세가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하다.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홍수를 겪어야 했지만 모래밭을 달리며 조개를 줍고 겨울이면 늪에서 노니는 수천 마리 겨울 철새들의 노랫소리가 왁자지껄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고향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넓은 강폭과 주변 산세가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하다.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홍수를 겪어야 했지만 모래밭을 달리며 조개를 줍고 겨울이면 늪에서 노니는 수천 마리 겨울 철새들의 노랫소리가 왁자지껄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지름길로 가느라 산을 오르내리며 등교했던 용산초등학교. 한때 폐교의 위기를 맞았지만 지금은 입소문이 나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름길로 가느라 산을 오르내리며 등교했던 용산초등학교. 한때 폐교의 위기를 맞았지만 지금은 입소문이 나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감로리 고향집. 지금은 어머님이 지키고 계신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감로리 고향집. 지금은 어머님이 지키고 계신다.
노명옥 소설가
노명옥 소설가

내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면 변함없이 떠오르는 몇 개의 풍경이 있다. 낙동강과 마을 앞의 늪과 초등학교까지 십리 길을 걸어다녔던 신작로. 그것들은 이제 사라지거나 변해버려서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경남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 감로. 내 고향 감로는 낙동강변의 비옥한 땅을 터전 삼아 농사를 짓고 살던, 사십 호가량의 농촌 마을이다. 강변을 따라 길게 형성된 들은 모래가 적당히 섞인 토질 덕분에 감자나 무, 배추가 잘 자랐다. 하지만 일 년에도 몇 번씩 농작물을 쓸어가는 홍수 때문에 작황은 매우 들쭉날쭉했다. 그렇긴 해도 감로리 일대에서 생산되는 채소는 워낙 실하고 때깔이 좋아서 밭떼기째 사들이는 상인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홍수에는 대책이 없었다. 새파란 강물이 누런 거품을 물고 뒤척이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죄다 강가로 나와 서성였다. 불어나는 강물의 수위를 지켜보며 호구지책에 시름겨운 어른들의 사정이야 알 바 없다는 듯 조무래기들은 마냥 신이 나서 설쳤다. 강에는 온갖 것들이 다 떠내려 왔다. 농작물과 세간, 가축, 심지어는 지붕만 남은 오두막이 기우뚱거리며 떠내려 오기도 했다. 어른들은 장대 끝에 낫을 매달아 쓸 만한 물건들을 건져냈다. 그들의 발치에서 구경만 하던 조무래기들도 공이라도 하나 발견할라치면 너도나도 강으로 뛰어들다가 제 부모에게 등짝을 얻어맞기 일쑤였다.

여름에는 주로 강에서 조개를 잡거나 뜨거운 모래밭을 내달리며 놀던 아이들이 겨울엔 얼음이 두껍게 언 늪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하늘도 시퍼렇게 얼어붙는 겨울의 늪은 밤낮으로 소란스러웠다. 밤이면 수천 마리의 새 떼가 늪을 쪼아먹는 소리들로 분주했고, 그중에서도 기러기 울음소리는 유별나게 시끄럽고 왁자했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늪도 사람도 밤새 뒤척이기만 하는데 새 떼만이 저희들 세상이었다. 줄과 물억새 마른 줄기는 겨우내 얼마나 부대꼈던지 새들이 떠날 무렵이면 꺼멓게 자지러져 그루터기만 남았다. 새 떼만 그랬을까. 별처럼 생긴 까만 마름의 속살을 발라먹던 조무래기들도 늪을 뻔질나게 드나들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여름만 기다렸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신작로의 열기를 식히며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날이면 늪의 미꾸라지들은 얕은 곳의 물풀 사이로 모여들었다. 나는 비가 긋자마자 곧장 늪으로 내달았다. 대소쿠리를 받쳐놓고 차근차근 포위망을 좁히는 내 발길을 녀석들은 피하지 못했다. 우왕좌왕 도망치는 녀석들의 몸뚱이가 물풀 사이로 일렁거렸다. 소쿠리를 건지고 물이 빠져나갈 동안, 어떤 녀석이 걸려들었을까 몹시 궁금해지는 그 짧은 순간이 왜 그렇게도 좋던지.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미꾸라지 잡는 재미에 푹 빠진 이유가 짐작이 되기도 한다. 오 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나는 농사짓느라 바쁜 부모님 대신 동생들을 돌봐야 했으므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덩치가 작았던 나는 동생을 한 번 업으면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엄마가 와서 받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내 등에서 잠이 들고 오줌을 쌌던 동생들. 등짝의 오줌이 흘러내려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추켜 입지도 못한 채 나는 마루에서 어정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고 지쳐버린 나는 벽에다 책을 붙여놓고 읽었다. 내 엉덩이쯤에 간신히 걸쳐진 채 우는 어린 동생. 그 동생의 배는 축축하면서도 따뜻했지만 나는 온통 책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랬다. 그 당시엔 책 또한 내 도피처였다. 십 리나 되는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으며 나는 거의 매일 책을 읽었다. 그 때문에 친구들과 똑같이 교문을 나서도 금세 뒤처져버렸다. 남자애들은 그런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작로에 수북이 돋아난 수크령을 군데군데 묶어놓고 내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덫에 걸려 넘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주저앉아 울었고 언덕 밑에 숨어서 지켜보던 애들은 신이 나서 킬킬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 애들을 강가의 버드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내가 먼저 공책을 찢었다. 준비한 성냥을 풀밭에 던진 뒤 찢은 종이를 가늘게 말았다. 우리는 이마를 맞댄 채 종이 담배를 피웠다.

이튿날. 나는 등교하자마자 그 사실을 선생님에게 일러바쳤다. 내가 한 짓만 쏙 뺀, 작정한 고자질이었다.

"하, 요놈들 보게. 어디 보자, 머리에 쇠똥이나 벗겨졌는지."

선생님은 작달막한 막대기로 차례차례 남자애들의 머릿밑을 들쑤시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맹옥이 너, 다시 말해 보거라. 야들이 정말로 담배를 피우더나?"

"예. K는 눈썹을 태워가지고 울 뻔했습니다."

"Y는 니도 같이 놀았다고 우기던데?"

"지는 정말로 구경만 했습니다."

남자애들 셋이 눈을 아래위로 홉뜨거나 말거나 나는 태연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사실대로 말한 Y는 사내답지 못하단 이유로 더 매를 벌었다. K와 S는 그 와중에도 사내답고 싶어서인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 Y야, 니는 담배 맛이 좋더나?"

"예!"

엉겁결에 튀어나온 대답 덕분에 Y는 양철동이를, K와 S는 들통을 둘러쓴 채 첫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탁 옆에서 벌을 섰다.

"오냐 요놈들, 이제 땀에 푹 절어 쇠똥도 홀랑 벗겨졌을 것이고, 그러니 내일부터 학교 오지 말거라. 집에서 담배나 빠꼼빠꼼 피우고 놀면 얼마나 좋을꼬, 알겠제?"

그날, 양철동이를 텅텅 두드리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몰래 웃었지만 그 후유증은 참 오래갔다. 지금도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 얘기부터 꺼내서 나를 민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향의 강변에서 함께 뒹굴며 놀았던 친구들은 변함없는데 자연은 이미 예전의 풍경을 잃어버린 지 좀 되었다. 마을 앞으로 고속도로가 막아서더니 이제는 4대강 정비 운운하면서 농토까지 죄다 파헤쳐놓은 상태이다. 그 맑고 깨끗하던 강물은 물장난하기도 꺼려질 만큼 더러워졌으며, 신작로 또한 모래먼지 휘날리며 줄을 잇는 덤프트럭 차지가 되어버렸고, 물고기와 새 떼,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늪은 진작 메워져 공장이 들어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편의만을 위한 개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머지않아 '가재비' 신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물가의 수초를 물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물고기를 가재비라 한다. 그러나 그 가재비들을 기다리는 것은 반두를 든 사람들이니, 그야말로 여우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셈이다.

낙동강과 더불어 아름답고도 풍요롭던 내 고향 감로. 이제는 강도 땅도 만신창이가 되어 앓고 있는 그곳. 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자연이 그토록 모진 훼손을 감당해야 하는가 싶은 한편, 이미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를 자연의 보복, 그 불가항력의 재앙에 맞닥뜨리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노명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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