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때 하얀 국이 나왔어." 무슨 말일까? 딸아이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고 1이면 곰탕이나 들깨국 따위를 모를 나이는 아닌데, 하얀 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하얀 국에 시리얼을 말아서 밥하고 먹었어." 하얀 국이란 우유였다. 영양학적으로는 말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식단이지만, 내겐 낯설었다. 그래도 딸아이는 어색하지 않았단다.
용수 할아버지는 80세 췌장암 환자였다. 암 진단 전까지는 남부럽지 않게 건강했다. 하루 일을 수첩에 빼곡히 메모할 정도로 기억력이 또렷했고, 먼저 떠난 부인 대신 다운증후군 막내딸을 돌보며 살았다. 평소 육식을 즐겼던 그는 큰딸의 권유로 채식 위주의 식사로 건강을 찾아주는 한 치유센터에 입원했다. 한번은 울산에서 작은딸이 아버지를 위해 돼지고기 수육을 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은 할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그대로 들어갔다. 심하게 왜곡된 큰딸의 음식에 대한 편견은 어떠한 설득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슬프게도 할아버지는 고기 반찬을 너무도 그리워했다. 그는 과연 고기 때문에 암이 왔을까?
나 또한 전업주부로 살 때보다는 음식 조리법이 표가 나게 달라졌다. 맛보다는 건강으로 흘러가는 식사에 끔찍하게도 적응을 못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다. 뛰어난 미식가이기 때문에 때로는 화를 버럭 내기도 한다. 나도 입맛은 개인의 고유한 느낌이며, 또 음식은 문화라는 것을 알면서, 할아버지의 큰딸처럼 식약동원(食藥同源:음식과 약은 근본이 같다)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음식이란 어떤 의미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식약동원이라는 말로, 그리고 서양에서는 히포크라테스가 한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라는 말로 음식의 중요성을 알린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오래된 말일까? 옛날보다 음식은 달라졌고, 약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해졌다.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을 약으로는 고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음식에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의 너그러운 조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김치, 된장, 고추장은 음식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맛있게 버무린 김장김치 한쪽을 쭉 찢어서 먹을 때는 '역시 나는 한국인이야' 하는 자부심도 가진다. 그러면서 김치 만들 때 한 보따리씩 들어가는 소금의 양 때문에 고민한다. 한국인의 영양섭취 기준인 하루 2g의 소금은 부엌에서 소금단지를 없애야 할 정도로 적은 양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고민하면 모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과학의 결과물인 약도 정확히 사용하면서 건강한 음식을 물려줄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다음부터는 '질환별 의학영양치료와 푸드 레시피'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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