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정기준이라는 유령

지난 연말에 종영한 T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한 대목.

 이도(세종): 나는 나의 글자로… 백성과 직접 소통하려 한다… 백성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이룰 것이다.

 정기준: 하면 백성의 욕망은? 그 거대하고도 무서운 군중의 욕망은 어찌할 것인가?… 너의 글자는 욕망통제체계를 무너뜨리고 지옥문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넌 백성에게 권력을 나눠주려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려는 것이다.

 이도: …

 정기준: 사실을 말해줄까? 너는 백성이 귀찮은 것이다. 글을 알았으니 이제 스스로를 지키라는 것이다.

우파 정기준, 민주주의의 맹점 정조준

무시무시한 논쟁이다. 당대 현실 정치의 승자이고 역사적 승자이기도 한 세종이 왜 정기준의 반론에 속내를 들킨 듯 입술을 떨며 머뭇거리는가. 먼저 토론을 청한 그가 토론하기를 멈추고 마침내 "나는 백성을 사랑한다"고 울부짖듯 소리쳤을 때, 이 논쟁의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논쟁으로부터 많은 의제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소통 혹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교양과 이성을 확장하는가, 아니면 욕망을 증대하는가. 읽고 쓰는 능력(literacy)은 SNS 시대에는 어떻게 번안되어야 하는가. 혹은 백성, 국민, 민족과 같은 불특정 다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진실한 감정일 수 있는가 등등.

여기선 다만 정기준이라는 유령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그의 확신에 찬 반론은 선거의 해를 맞은 오늘의 나를 움찔하게 만든다. 이 시대착오적인 귀족정치 신봉자가 우리의 내면에서 정말 사라졌을까. 사라졌다면 그의 반론에 말문이 막힌 세종을 왜 오늘의 우리가 동일시하는 걸까.

편의상 세종을 좌파, 정기준을 우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좌파의 제1 의제는 공존이며, 우파의 제1 의제는 힘(부강)이다. 현실 정치의 좌우파는 각각 상대방의 제1 의제를 자신의 제2 의제로 삼는다. 오늘의 좌우논쟁의 바탕에는 대개 공존과 힘의 우선순위 다툼이 놓여 있다.

공존은 아름답지만 피곤한 의제다(공존의 대상을 도대체 어디까지 확대해야 하는가). 힘은 매혹적이지만 잔혹한 의제다(나'우리의 즉각적인 힘 증대를 위해 당장은 누군가 희생되어야 한다). 종교적 경지의 신념을 갖지 못한 백성이자 늘 힘의 부족으로 쩔쩔매는 범인으로서의 우리는 양자 사이에서 방황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안철수라는 잠재적 정치 영웅에의 기대는 그가 양자의 조화라는 거의 불가능한 기획을 사적 층위에서나마 완성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대에는 기업가 영웅 이명박이 국가 공동체의 부강을 이룰 적임자로 보였던 5년 전, 그리고 뛰어난 인품과 교양의 노무현이 공존의 시스템을 완성할 적임자로 보였던 10년 전의 좌절된 기대가 결합되어 있다.

정기준의 말은 기대의 거듭된 좌절을 경험한 우리의 불안과 피로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기대가 다시 배반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를 지도자로 뽑은 건 바로 우리 각자가 아닌가. 투표라는 도박에 가까운 행위에 왜 그토록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가. 이 피로감과 불안이 극에 달할 때 파시즘의 유혹이 시작된다는 사실, 나치즘을 낳은 건 바로 민주주의 자체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해도, 투표함 앞에서의 회의(懷疑)는 쉬이 가시지 않는다. 정기준의 말은 그 회의를 정조준한다.

약속의 확성기 앞에서 더 많은 회의를

정기준의 반론이 정말 무서운 것은 그가 정치를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통제로 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는 그것이 줄 수 있는 재화보다 더 큰 소비에의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존속된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처럼 아무리 배를 채워도 허기가 멎지 않는 괴물이 되었다.

하지만 선거에 나선 어떤 지도자도 욕망의 통제를 요구할 수 없고, 욕망의 충족을 약속해야 한다. 약속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유령 정기준은 "지옥문은 이미 열렸고 이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고 비아냥거릴 것이다.

선거의 계절에는 회의보다 확신의 목소리가 훨씬 강력해진다. 정기준이라는 유령은 확신과 약속의 확성기 앞에서 더 많이 회의할 것을 요청한다."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제도이다. 하지만 아직 그보다 나은 정치제도는 없다"는 윈스턴 처칠의 역설에서 우리는 앞 문장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허문영/영화평론가, 영화의전당 영화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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