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거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과 끊임없는 접촉으로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을 축으로 하는 외교를 폈다. 특히 중국과의 외교는 '물길(水路) 4천 리, 뭍길(陸路) 1천~2천 리'를 오가는 동안 숱한 사신(使臣)들이 물고기 밥이 되거나 병으로 불귀(不歸)의 객이 됐다. 목숨을 건 사신들의 외교 통상 활동은 조선의 한 가난한 부자(父子) 외교관의 노력으로 온전한 기록으로 남았고 이는 조선 임금과 재상들의 필독서가 됐다. 오늘날엔 조선의 대외 관계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자료가 됐다.
'통문관지'(通文館志)란 책이다. 고려조 대외 업무를 맡았던 '통문관'에서 이름을 땄다. 통문관은 조선 개국 뒤 사역원(司譯院)으로 바뀌었고, 사역원은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500년 지속한 조선의 외교 통상 실무 담당 부서였고 역관(譯官) 양성 기관이었다. 요즘 외교통상부 일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을 만드는 데는 나랏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정으로부터 정해진 녹봉(祿俸)도 받지 못한 역관들이 경비를 모아 책을 간행됐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1708년 초안 완성 뒤 1720년 첫 간행된 통문관지는 숙종조 역관 김지남(金指南'1654~1718)'경문(慶門'1673~1737) 부자가 동료 2, 3명의 협조를 받아 만들었다. 비용은 다른 역관 3명이 댔다. 당시 역관들은 조정에서 녹봉을 받지 않았다. 이들에겐 대신 은전 2천 냥에 해당하는 인삼 80근(斤)을 여덟 개 자루에 넣어 중국을 오가며 팔아 비용에 충당하고 생계를 꾸리는 것이 허용됐다. 소위 '8포(包)' 무역으로 일종의 사(私)무역이었다. 김 씨 부자는 치부에 관심이 없어 8포 무역에도 가난했다. 동료 역관의 도움으로 원고 준비 12년 뒤 겨우 책을 냈다. 김 씨 부자나 경비를 십시일반 낸 동료 역관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개념' 있는 관리였기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금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이 외교부에 쏠리고 있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생긴 외교부가 유례없는 잡음에 휩싸였다. 외교장관 딸의 특채 파동, 중국 여성과 상하이 영사와의 부적절한 관계, 아프리카 상아 밀반입, 러시아 지역 영사 만취 추태 사건, 카메룬 다이아몬드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복마전이다. '개념' 없는 외교 공무원들에게 300여 년 전 가난한 선배 외교관들의 땀과 정성이 배인 통문관지를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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