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정(浮江亭)을 중심으로 펼쳐진 낙동강과 금호강은 조선중기 영남지역 거유(巨儒)인 한강 정구 선생의 선유(船遊)공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주출신인 정구는 조식과 이황에게서 배운 성리학의 집대성과 경학'산수'병진'의약'풍수'예학에 이르기까지 정통했고 필체도 뛰어난 당대의 명문장가였다.
을사년인 1605년(선조38) 3월 들어 정구는 자신의 문인(門人)인 달성의 서사원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팔거현(칠곡) 일대의 외가를 비롯한 선대 선영의 성묘 계획을 통보한다. 성묘를 하기 위함이었지만 문인들로서는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서사원은 몇해 전(1601년)에 지은 자신의 완락재에 스승을 모실 기회로 생각했다. 그는 당초 3월 말로 예정됐던 스승의 성묘행이 갑자기 3월 초순으로 당겨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서사원은 정구 일행이 3월 6일 고령의 어목정을 출발해 대구 인근의 노다촌에서 묵는다는 풍문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 사람을 보내 동향을 살폈다. 서사원은 자신의 문집인 낙재집에서 스승을 영접한 사실을 기술해 놓고 있다.
-8일 오후 스승께서 타신 배가 척성 아래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작은 배로 급히 강 입구로 내려가니 선생의 행차는 이미 부강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황송스러운 마음에 배에서 내려 빨리 뭍으로 올라가 포복한 채로 들어가 절을 하고 뒤늦음을 사과했다-
정구와 서사원은 불과 일곱 살 터울이지만 서사원이 포복을 하고 맞을 정도로 사제간의 위계질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했다. 정구의 성묘행에 박정번, 곽근, 이후경, 이란귀 등 정구의 문인들이 동행했다. 선생의 문인들이 다수 따라 나선데다 고령의 어목정에서 배를 빌려 띄우고 중간에 노다촌을 거쳐 부강정에 들렀다는 사실은 단순히 성묘만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서사원은 스승이 부강정에 도착했을때 금호강 줄기에 자리한 자신의 완락재로 모시고 싶었지만 날이 저문 탓에 부강정에서 함께 유숙하게 된다.
부강정에서 하루를 묵은 정구 일행은 다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와 선사의 완락재에 도착해 늦은 아침을 들었다. 서사원의 요청으로 늦은 점심시간부터 술자리가 열렸다. 이때 인근에서 온 선비 70여 명이 참석한 잔치는 대성황을 이뤘고, 서사원은 스승과 혼자서 동숙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손처약 등 대구향교 유생들의 술잔이 이어졌고 인동에서는 장현광이 급히 달려오기도 했다.
이날 정구에게 경상감사 이시언이 사람을 보내 급한 공무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는 안타까움을 전했다.
완락재에서 이틀을 묵은 정구는 선영을 찾아 성묘를 하고 박정번, 곽근 등이 대기시켜둔 배를 타고 다시 부강정에 들러 하루를 묵고 다음날 성주로 돌아가게 된다. 정구가 서사원의 완락재를 찾았을때 달려온 손처눌(慕堂集)과 도성유(養直集) 등은 자신의 문집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서사원은 스승 정구를 극진히 영접하고 떠나보낸 소회를 이렇게 나타냈다.
-선생께서 나같이 용렬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문하를 출입하도록 허락하신 지가 벌써 30년이 됐다. 난리 속에서도 말석에서나마 가르침을 듣게 됐고, 오늘저녁에 또 완락재를 찾아주셨으니 그 큰 영광 어찌 만에 하나라도 형용하여 사례할 수 있겠는가….
정구선생은 1605년 선대 선영에 대한 성묘를 겸한 서사원의 완락재 방문 이후 12년 뒤인 1617년 7월 부강정에서 동래(부산) 온정까지 온천욕을 겸한 45일간의 선유를 하게 된다.
봉산욕행(蓬山浴行). 봉산은 옛 동래의 지명이다. 정구가 신병 치료차 동래로 온행을 떠난 것은 1617년 7월 20일 새벽이었다. 정구 일행이 탄 배는 도동서원 소유로 원장 곽근이 정갈하게 수리해 하루 전에 대기시켜 둔 것이었다.
칠곡 지암에서 배를 띄운 정구 일행은 하빈~현풍~고령~창녕~함안~영산~밀양~김해~양산을 거쳐 7월 26일 목적지인 동래온정에 도착했다. 7일간의 여정에 물길 710리, 뭍길 20리 등 730리에 이르는 원행이었다.
동래온정에서 꼬박 30일을 묵으며 온천욕과 휴식을 취한 정구는 그해 8월 26일 동래를 떠나 양산~통도사~경주~영천~하양~경산을 거쳐 9월 4일 대구 사수로 돌아오게 된다.
칠곡 지암을 출발한 정구 일행은 하빈 부강정을 지나 금강 앞 여울에서 아침을 먹는다. 다시 원당포를 지나 노다암에서 이로'이서 등 10여 명의 선비들과 만나 잠시 배를 멈춰 이들과 간단한 술자리를 가진 뒤 하행하게 된다. 이때 신안현감 김중청이 병이나 직접 영접지 못하는 대신 이윤우에게 시를 보내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전해 왔다.
-소미성의 빛이 정수 궤도에 비치는 가을에/노나라 늙은이가 어찌 바닷가 놀이를 사양하랴/나도 말미가 있으면 따르려 했는데 지금 병으로 누웠으니/저 무리들 말 옆에서 모시고 가는 것 부럽구나-
이에 정구는 편지를 보내 성의에 답했고 이윤우를 비롯한 10여 명의 선비들은 배위에서 화답시를 짓는 등 자연스럽게'주상시회'(舟上詩會)로 이어져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이 날 오후 덕산을 지나 해질무렵에 쌍산의 수문에서 이언영과 작별한 일행은 영파정을 지나 도동서원 서상재에서 첫날밤을 묵고 다음날은 김굉필의 산소를 참배한다.
출발 이튿날인 7월 22일 정구 일행은 출범 때부터 동행했던 곽영희'이명룡 등과 헤어진 뒤 고령의 어목정과 부래정을 지나 초저녁에 창녕 경계의 우산촌가에서 유숙하게 된다.
당시 75세로 고령이었던 정구는 성주'달성'칠곡 일대의 주거기반, 창녕현감, 함안군수를 지낸 경력과 낙동강 연안에 많았던 사우문인들로 인해 누구보다 낙동강과 그 주변의 명소들을 감상할 조건과 기회가 많았다.
-평생에 무슨 일이 가장 으뜸이던고/오늘의 뱃놀이도 노래할 만하구나/좋은 벗과 해후하여 함께 취했는데/물속에 잠긴 저녁노을 너른 물결을 비추네-
처음부터 정구와 동행했던 문인은 채몽연 곽영희 이천봉 이언영 이윤우 배상룡 이명룡 유무룡 이난귀 이학 정천주 등 12명이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중간에 돌아가 이윤우 이서 이천봉 이육 등만 남게 됐다.
총 45일에 걸친 정구의 온정욕행은 신병 치료에 목적이 있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선유를 겸한 여행이었다. 아울러 이 여행은 이미 정구에게 낙동강의 여러 풍물을 재음미하며 자연과 더불어 행하는 수양의 과정이었고 낙동강 연안의 문인, 제자들과 정담을 나누고 학문을 토론하는 회합의 장이었다.
정구의 온정욕행 기간 중에는 경상감사 윤훤은 직권으로서 여행에 따른 제반 편의를 제공하다 경산의 소유정에 이르렀을 때는 몸소 영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구부사, 신안현감, 초계군수, 창원'밀양'김해'동래부사, 경주부윤 등 지방관이나 도동'연경'신산'자천서악·임고서원, 성주'밀양'동래향교에서도 정구에 대한 문안과 영접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봉산욕행록'에 따르면 정구가 45일 동안의 온정욕행 과정에서 만난 선비들이 약 300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자신의 문하 문인이 80여 명이다. '회연급문록'에 수록된 한강 정구선생의 문인은 모두 342명에 달한다.
정구가 동래온정에서 온천욕을 마치고 동래를 떠나 양산~경주~영천을 지나 하양에 도착해 김사행의 식송정에 거처를 정하자 30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찾아와 예의를 표했고 하양현감 채득은 관비로 차와 저녁을 제공했다.
이윽고 9월 4일 정구 일행이 경산의 반야촌을 거쳐 금호강 소유정에 이르자 경상감사 윤훤이 미리 와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구의 마지막 경유지였던 소유정은 금호강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정자였다. 당시 소유정의 주인은 채선길이었지만 원래 소유정은 그의 아버지 채응린이 건립한 것이었다.
소유정에서 술이 오가는 연회를 마친 정구는 저물녘에 거처인 사수촌(泗陽書院)으로 돌아감에 따라 45일간에 걸친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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