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퇴계학을 크게 발전시킨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을 비롯한 이름난 성리학자를 배출한 명문이 재령 이씨 집안이다. 황해도 재령이 본관지인 그들이 맨 처음 경북에 자리 잡은 곳은 영덕군 창수면이며 주요 활동무대가 영양군 두들마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한 파가 비슷한 시기에 청도군 이서면 금촌에 자리 잡아 5세기를 이어오고 있는 것은 미안하게도 최근에 알았다. '충효마을 재령 이씨 취락, 1993, 이병하(李秉河)'와 그 이외의 자료에 의하면 그들이 청도에 터를 잡은 내력은 다음과 같다.
원래는 신라 개국공신이자 육부촌의 알천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의 후예였다. 고려 중기 이우칭(李禹稱)이 문하시중의 벼슬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재령을 식읍으로 받고 재령군(載寧君)에 봉군되면서 월성 이씨에서 재령 이씨로 분관되었다. 그 후 여말 순성보조공신 상장군인 이소봉(李小鳳)이 공민왕의 사위가 되면서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공에게는 일상(日祥)과 일선(日善)의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일상은 경기도 김포에 정착하고, 둘째 일선은 아들 6형제를 데리고 왕도 개성을 떠나 영남지방으로 내려와 아들 술(戌)과 손자 영중(榮中)과 더불어 3대가 밀양에 살았다.
영중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장손(長孫)은 김해로, 둘째 계손(繼孫)이 선초 세종연간에 자손이 번성할 터전을 찾아 헤매다가 산자수명하고 땅이 기름진 청도 이서의 금촌(琴村)에 자리 잡아 뿌리를 내렸으니 이분이 곧 청도 입향조가 된다.
공은 전라도 고부군(현 정읍시)의 군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마치고 떠나올 때 평소 애용했던 벼루 한 벌만 달랑 들고 돌아오니 공의 청렴한 공직자의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은 고을 사람들이 당시에는 매우 귀중한 구리와 청동으로 송덕비를 세웠다.
공은 금촌에 자리 잡고 산수가 아름답고 땅이 기름진 이곳을 차지한 기쁨을 남기려는 듯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으니 지금도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다. 줄기를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수많은 뿌리처럼 그 후 훌륭한 인물이 줄줄이 태어났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임진왜란 때 수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워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지고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된 이운룡(李雲龍)을 들 수 있다. 공은 1562년(명종 17)에 청도에서 남해현령 몽상(夢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임명되고 1589년(선조 22) 공의 나이 31세 때 옥포 만호(萬戶)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의 수군이 거제를 침공해 오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지레 겁을 먹고 전선(戰船)과 무기를 바다 속에 침몰시키고, 곤양으로 도피한 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공은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이니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가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원균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원균의 구원 요청에도 이순신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본래부터 신중한 성격이었고, 왜군의 전투 능력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며, 경상도 물길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공이 직접 이순신을 찾아가 출병을 이끌어 냈다.(백지원, 2011년 '조일전쟁' 진명출판사)
1592년(선조 25) 5월 7일, 경상우수영 수군과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수군이 합세하여 거제도 동쪽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적병을 맞아 싸웠는데, 이 싸움에서 공은 선봉장으로서 전군을 지휘하니 왜군은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이 결과 적선 50여 척을 격파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으로 왜군의 기세를 한풀 꺾었다. 이운룡의 과단성이 바로 승리의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에도 여러 해전에 참가하여 우리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워 1596년(선조 29) 경상좌수사로 승진했다. 전쟁이 끝난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식성군에 봉해졌다.
명나라 지원군의 유격장 모국기(茅國器)가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선조와 작별인사를 할 때 '수로 총병 이운룡은 육군의 정기룡과 함께 훌륭한 장수로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싸우는 것에서 이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평가했다.
1605년(선조 38) 내직으로는 도총부부총관'비변사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아가서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군직에 복무, 활동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다.
1610년(광해군 2) 돌아가시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도의 금호서원(琴湖書院)과 의령의 기강서원(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식성군실기' 2권이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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