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스라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풍경들이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 동네마다 흔히 보이던 방앗간과 대장간도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래도 꿋꿋이 한자리를 지키며 옛 모습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지난달 26일 오후 대구 번개시장 입구. '뻥! 뻥! 뻥!' 뻥튀기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뻥! 소리가 나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다 서서히 걷히면서 구수한 냄새가 시장통을 가득 메운다. 매서운 겨울 한파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설명절 땐 말할 것도 없고 365일 뻥! 뻥! 터지는 소리에 시장은 흥겹다. 장 보러 온 손님들이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전부터 뻥튀기 하면 번개시장이다. 전국 시장 중에 가장 많은 뻥튀기 가게가 번개시장에 있다. 고작 5곳인데도 가장 많다고 하니 그만큼 뻥튀기 가게가 세월 속에 사라지고 있다.
이곳에서 30년째 뻥튀기를 하고 있는 '뻥튀기 아줌마' 김옥년(58) 씨. 털모자에 색안경을 끼고 목에는 호루라기를 걸고 있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한 봉지 튀기는 데 2천원, 싸다 싸." 번개시장 인근은 물론 멀리서 온 손님들이 튀길 봉지를 하나씩 들고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있다.
김 씨는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뻥'하며 뻥튀기 기계를 힘차게 돌린다. '뻥'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지 말라고 '삑~'하고 호루라기를 분다고 한다. "돈과 사람 빼고는 다 튀겨낸다"며 "밤, 쌀, 보리, 옥수수 등 곡물류는 압력이 높은 재래식 뻥튀기 기계로 튀기면 볶거나 구울 때보다 맛이 훨씬 좋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격도 한 되에 2천원이면 충분하다.
김 씨는 일명 '춤추는 아줌마'로도 불린다. 김 씨는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함께 삶의 애환을 나눈다. 설, 추석 등 명절 땐 하루 400근을 튀겨내며, 뻥튀기를 받아내는 망의 무게도 무려 15㎏이나 된다. 이 무거운 망을 하루에 100번은 든다고 하니 중노동이다. 김 씨는 오전 5시에 출근해 장이 파할 무렵인 오후 6시까지 되풀이하는 뻥튀기 일이 힘에 부치지만 춤을 추면 활력이 불끈 솟는다고 한다.
김 씨가 떡, 쌀, 강냉이 등 각종 재료를 튀기는 데는 3, 4분 정도면 충분하다. 튀겨낸 강냉이는 마치 첫눈을 틔운 목화 같다. 바짝 마른 떡국용 떡은 아기 손바닥만 하게 부풀어져 보기만 해도 푸짐하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은 지난날 할머니가 손에 쥐여주신 바로 그맛이다. 팔달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할아버지는 요것조것 보따리를 풀어 깡통에 붓는다.
"이 집이 제일 맘에 들어. 평생 단골이지. 맛있고 깨끗하게 튀겨." 할아버지는 뻥뻥 튀기는 풍경을 보며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제, 뻥튀기 기계 한 대면 투자할 일도 없어." 아버지로부터 뻥튀기 기술을 전수받은 김 씨는 30년을 한결같이 뻥튀기 기계와 씨름하고 있다. "튀길 때 기계 압력을 잘 조절하는 게 중요해. 압력이 너무 높으면 부스러기가 많이 생겨 맛이 떨어져."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히 터득한 뻥튀기 비법(?)이란다.
"이왕 하는 일, 손님들을 위해서 즐겁게 일하는 게 좋지요. 일부러 멀리서 오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은데 좀 적게 받고 적게 남기면 어떻습니까. 이 쌀 한 되를 뻥 튀기면 얼마나 많아집니까. 우리들 세상 인심도 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뻥튀기처럼 우리네 정을 듬뿍듬뿍 튀겨 냈으면…."
'뻥튀기 아줌마'의 희망은 소박하다. 건강한 몸으로 번개시장에서 오랫동안 손님들과 함께 뻥! 뻥! 뻥튀기를 터뜨리는 것이다.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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