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태(胎)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는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을 받게 된다. 좋은 땅이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하여야만 길지(吉地)가 된다.'
우리 선조들은 출산 후 산모와 아기가 분리되는 태를 소중하게 다루어 처리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태를 봉안한 장태기록을 찾을 수 있다. 고려 왕실에서 태 봉안 양식이 확립되고, 조선시대에 그 맥락이 이어졌다.
왕실은 물론 민간에서도 장태의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자, 공주 등을 출산하면 예외없이 태를 땅에 매장했다. 소위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거쳐 묻었다. 이렇게 완성한 시설을 태실(胎室)이라 부른다. 태실이 있는 산을 태봉(胎峰)이라 했다.
요즘 신세대 부모들은 아기 출산 후 태'배꼽 등을 기념으로 보관한다. 또 백혈병 등 만약의 질병에 대비해 탯줄에서 채취한 제대혈 등을 보관하는 추세다. 조상의 풍습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북봉 사두혈을 오르며
천년 고찰 직지사를 품은 황악산 끝자락 북봉(北峯)은 사두혈(蛇頭穴)의 명당으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 2대 정종(定宗'1357~1419)의 어태가 봉안되면서 태봉으로 명성을 더했다.
직지사 대웅전 옆에 있는 성좌각(星座閣)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수백 년 수령을 자랑하는 울창한 소나무를 만난다. 마치 무슨 호위병이라도 되는 듯 앞뒤, 좌우에 늘어서 길을 내고 있다. 이 소나무 숲은 직지사 뒷산인데다 태봉이 있어 잘 보존돼 온 것이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태봉은 사방에 금표(禁標)를 치고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못하게 했던 성역이었다. 상당수 소나무 밑둥에는 'v' 모양의 흠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소나무 진액인 송진을 따기 위해 사람들이 낸 생채기다.
오솔길 주변 곳곳의 흙은 파헤쳐져 있다. 눈이 오자 멧돼지 가족들이 산 아래까지 내려와 약초'풀뿌리 등 먹을 것을 찾으려고 뒤진 흔적이다. 북암마을에서 올라온 등산로와 만나고 오른쪽으로 향하면 잡목들 사이로 20여 평의 공터가 드러난다. 바로 북봉 사두혈에 모셔진 정종의 태실이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국장은 "태실 중에서도 왕으로 등극한 경우에는 가봉(加封) 태실비가 웅장하게 세워졌다. 태실 중동석을 중심으로 주변에 석물로 치장하고 둘레석을 세워 출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석물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훼손된 일부만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이곳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 총독부가 태실의 훼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옮겼다. 태실을 보호하던 태실비, 석물 등은 깨트리고 파헤쳐 흩어 놓았다. 일제가 조선왕실의 정신적 지주인 태실의 존엄과 품격을 훼손해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책략으로 저지른 만행이다.
정종 태실 중심에 있던 태 항아리를 보관했던 중동석은 현재 직지사 극락전 잔디밭으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울타리석 8개 중 2개가 청풍료 앞에, 또 다른 1개가 태봉 정상 비탈진 구석에 온전하게 남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태봉의 주인공 정종(定宗)
직지사 태봉의 주인공인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이다. 1399년 태조의 양위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기간은 1년에 그친 불운의 임금이다. 왕권을 둘러싼 '형제의 난' 과정에서 즉위 다음해인 1400년에 왕위를 아우인 태종에게 물려줘야만 했다.
기록에 따르면 정종 태실은 즉위한 해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출생한 정종의 태가 조선왕조 개창 후인 1399년에야 이곳에 안태된 것으로 볼 때 당시 관습상 다른 곳에 임시 안태했던 태를 임금으로 등극 후 이안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정종 원년 4월 5일)에 따르면 '중추원사 조진을 보내 김산현에 태를 안치하게 하고 김산을 군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봉의 보수 및 가봉내역을 기록한 '태봉등록'(胎峰謄錄)에도 '정종대왕의 태봉이 김산 직지사 뒤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종은 자신이 즉위하고 다른 곳에 안치돼 있던 태를 명당으로 이름난 직지사 대웅전 뒤 북봉에 안치하고 직지사를 태실을 수호하는 수직(守職)사찰로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황악산 태봉은 직지사 북쪽에서 계란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발 100m에 미치지 않고 앞쪽에는 들판이 보이는 그야말로 원자(元子)나 원손(元孫)의 태를 봉안하는 1등급 태봉으로 부족함이 없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태실로 달라진 김천의 위상
정종의 태실이 황악산에 봉안됨으로써 김천은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다. 1399년 임금의 태가 봉안됨으로써 김산현이 어모현을 폐합하여 김산군으로 승격한다. 그동안 속현에 불과했으나 군으로 승격돼 종6품 현감이 부임하던 작은 고을이 종4품 군수가 부임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김천의 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
조선 중기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장가 적암 조신(曺伸)은 "옛날 감문국에 딸린 작은고을이 번성하고 백성이 많아진 것은 선대왕의 태봉이 있기 때문"이라고 시문에 기록할 정도다.
또 조선은 유학을 숭배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정종의 태실이 사찰 경내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 직지사가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돼 탄압의 그늘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오히려 일정 부분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아 조선 말까지 사세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또 다른 김천의 태실들
예부터 명당이 많기로 유명한 김천에는 황악산 정종 태실 말고도 다섯 곳의 태실이 더 있다.
지례면 관덕리 궁을산, 대덕면 연화리 태봉산, 농소면 신촌리 태봉산, 어모면 은기리 태봉산, 감문면 광덕리 안태봉이다.
그 중 태봉의 주인공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지례 활람마을 궁을산에 있는 숙명 공주와 숙경 공주의 태실이다. 이들 공주는 조선 17대 효종의 3녀와 6녀이다.
공주의 태실은 보기 드물게 쌍태로 안치되었다. 출생한 당대가 아닌 1660년 이들의 오빠인 현종의 즉위 원년에 함께 태실이 조성된다. 이는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태실 조성에 따른 지역민들의 폐해가 거론됨에 따라 왕실에서 이를 적극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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