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묵값은 내가 낼게(이 종 문)

그해 가을 그 묵 집에서 그 귀여운 여학생이 묵 그릇에 툭 떨어진 느티나무 잎새 둘을 얌얌얌 씹어보는 양 시늉 짓다 말을 했네

저 만약 출세를 해 제 손으로 돈을 벌면 선생님 팔짱을 끼고 경포대를 한 바퀴 돈 뒤 겸상해 마주 보면서 묵을 먹을 거예요

내 겨우 입을 벌려 아내에게 허락받고 팔짱 낄 만반 준비 다 갖춘 지 오래인데 그녀는 졸업을 한 뒤 소식을 뚝, 끊고 있네

도대체 그 출세란 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출세를 아직도 못했나 보네. 공연히 가슴이 아프네, 부디 빨리 출세하게

그런데 여보게나, 경포대를 도는 일에 왜 하필 그 어려운 출세를 꼭 해야 하나. 출세를 못해도 돌자, 묵값은 내가 낼게

해학이 넘치는 자유롭고도 상쾌한 작품을 보여주는 이종문 시인의 시조입니다. 시조가 지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풍자와 해학인데 요즘 이런 시조를 보는 일이 귀하게 되었으니 시대가 변하였을까요, 시절가조(時節歌調)의 뜻이 변하였을까요.

귀여운 여학생이 출세를 걸고 일종의 프러포즈를 한 셈인데, 졸업을 한 후에 소식이 영 없으니 선생님 마음이 갑갑하겠지요. 어디선가 스승님을 깜짝 놀라게 할 큰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세상은 제 몸 하나 일으키는 데도 힘이 드니 가슴 아플 밖에요.

스승은 스승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약속 하나에 마음 묶었으니, 적당한 타협 없이 제대로 약속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언젠가 그 날이 오면 그 자리에 저도 좀 불러주시길. 묵값은 제가 낼 테니.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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