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육 느낌표] '지금, 여기'에서 '내일, 거기'로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중에서)

한동안 젊은이들의 스펙 쌓기 열풍이 불었다. 알고 보면 그것도 그들의 주체적인 선택이었다기보다 '지금, 여기'에 대한 불안감과 절망감의 다른 표현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하지 않으면 뭔가 낙오된다는 그런 생각. 일종의 '평균의 자석' 원리이다.

하지만 최소한 평균에라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어리석다. 한 학급에서 체육복을 공동구매하기로 했다. 아이들 평균 키는 160cm. 선생님은 그에 맞춰 35벌을 구입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학급에서 체육복을 입을 수 있는 아이는 고작 5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교육 평가에서는 평균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이는 아이들이 지닌 개별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전제한 것이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개별성을 지닌다. '덩이줄기'란 것이 있다. 그것이 뿌리와 다른 것은 곁뿌리나 잔뿌리들이 모이는 어떤 중심이 없다는 점. 중심이 없으니 일정한 방향이나 도달해야 할 목적지 또한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캐내어도 어딘가에 잔뿌리가 남아 또 어디론가 뻗어나가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지금, 여기'는 덩이줄기의 시대다. 쉽게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되지도 않는다. 방법은 하나! 그 존재를 존재 그대로 인식하고 그 존재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는 중요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금, 여기'가 친숙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건 이미 지나간 시간과 공간이다. 거기에서 집착이 생기고 오류가 발생한다. 아이들은 이미 유목에 익숙하다. 유목을 거부하고 '지금, 여기'에 머무르려는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이라기보다 어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어른의 그늘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없기에 그런 아이들은 결국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한다.

'지금, 여기'가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내일, 거기'를 찾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현재를 즐겨라'고 한 것은 멋대로 현재를 유희하라는 뜻이 아니라 현재 내가 마음을 두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지금, 여기'는 흐르는 시간처럼 '내일, 거기'로 흘러간다. 이른바 '노마드의 시대'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유목의 시대, 덩이줄기의 시대에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들은 자신이 지닌 잠재력에 대해 잘 모른다. 아이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정확한 지적과 비판보다는 호기심과 관심이다. 선생님은 네비게이션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침반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게 되겠어?'라고 하면서 선생님의 판단에 따라 길을 제공하지 말고, '한번 해 볼래?'하면서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자극해야 한다. 그러한 자극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 힘을 주어야 한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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