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더 이상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최근 특목고와 자율형사립고를 중심으로 고등학생들이 논문을 쓰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학입학전형에서 입학사정관제 비중이 커지면서 교실 현장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진로에 맞춘 논문은 진로 활동뿐 아니라 심화학습, 자기주도적 학습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지원 대학의 입학사정관에게 제시할 포트폴리오로 안성맞춤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일반계고에서 논문을 쓰기란 쉽지 않다. 특목고, 자사고와 달리 교육과정 안에 심화학습 과정이 포함돼 있지 않아서다. 학생들의 수준도 천차만별이고 논문 쓰기지도 등의 노하우도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경덕여고와 송현여고의 논문 쓰기 활동은 더욱 돋보인다.
◆경덕여고, 첫 논문집 발간
"좀 더 잘 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아쉬움이 남아요."
경덕여고(교장 엄재길) 2학년 변지영 양은 1일 자신의 글이 담긴 '경덕여고 논문 모음집'을 펼쳤다. 장래 방송이나 영화 분야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지영이가 여름방학을 꼬박 바쳐 쓴 논문 제목은 '3D 입체기술이 문화생활에 미치는 영향'. 영화 '아바타'를 예로 들어 3차원(3D) 기술을 설명하고, 이 기술이 전자기기와 가전제품 등 얼마나 다양한 곳에서 쓰일 수 있는지 적었다.
"제가 쓴 글이 책으로 나왔다는 게 기분이 좋긴 해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엔 60점 정도만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이 모자라 깔끔하게 다듬지도 못했고 적으려다 빠트린 내용도 있거든요."
경덕여고는 1일 재학생들의 논문 55편이 담긴 논문 모음집을 발간했다. 경덕여고가 학생들에게 논문을 쓰게 한 이유는 대입 수시전형과 입학사정관제 확대 등 변화하는 대입 제도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서다. 논문을 쓰며 진로를 탐색하고 공부에 깊이를 더했다는 것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 편당 A5 용지 4장 내외인 논문 모음집에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물이 담겼다. '화장을 하는 청소년의 증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1학년 권민지)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청소년의 수면 부족에 미치는 영향(1학년 박소정) ▷유전자 변형 식품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1학년 윤예지) ▷영어 단어 반복 암기가 기억 지속에 미치는 영향(2학년 김혜린) 등 각자의 관심 분야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달 졸업을 앞둔 박예은(3학년) 양은 동기 4명과 함께 '탐구형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고등학교 미분과 적분 및 통계영역 학습자료 개발에 관한 연구'를 실었다. 수학 학습 과정에서 계산기, 컴퓨터 등 공학 도구를 사용하면 학습시간을 줄이고 이해하기도 쉽다는 것을 설명한 논문이다. 함께 논문을 쓴 허지은(3학년) 양은 이 내용을 포트폴리오에 담아 수시전형으로 서울대 전기공학부에 합격했다.
예은이 역시 논문 쓰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머리에 생각은 맴도는데 글로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애를 좀 먹었죠. 그래도 결과물을 보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예은이 팀의 논문 쓰기를 지도한 이원효 교사(수학과)도 애를 먹긴 마찬가지. 기대했던 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는 통에 학생들과 일대일로 씨름을 해야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칭찬해줘야죠. 그동안 '표현이 잘못됐다' '글이 너무 짧다' 등 잔소리도 많이 한 데다 고3이라 부담이 클 텐데도 다들 잘 따라와줬으니까요."
논문 쓰기 활동을 총괄한 이원수 교사는 진로 탐색에서 논문 주제 잡기, 논문 쓰는 방식 등 여러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라고 했다. "처음 하는 시도라 백지상태인 학생들에게 일일이 가르쳐야 했으니 교사들이 고생을 좀 했죠. 그래도 대학 입학사정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니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겁니다."
◆송현여고, 논문에 세상을 담다
송현여고(교장 김영보) 책쓰기 동아리 '책담세'(책으로 담아내는 세상의 줄임말) 회원들도 지난연말 논문집을 펴냈다. 2009년 동아리가 만들어진 이후 논문은 아니어도 글쓰는 연습을 계속 해왔던 터라 고등학생이 쓴 것치곤 내용이 제법 알차고 논문들 간에 수준도 고른 편이다. 2학년 4명, 1학년 12명이 6개월여 기간 동안 정성을 들인 논문집 이름은 '아름다운 경제'다.
사회복지사가 꿈인 권혜빈(2학년) 양이 쓴 논문 주제는 '장애인 복지 바우처 사업'. 장애인 관련 자료를 뒤적이다 바우처 사업이 있다는 걸 안 뒤 이 분야를 파고들었다. 특정 수혜자에게 교육, 주택, 의료 등 복지 서비스 구매 비용을 보조해주기 위해 지불을 보증하는 전표를 나눠주는 것이 바우처 사업. 혜빈이는 복지 선진국인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와 우리나라 실정을 비교, 정부와 기업의 관심이 더 필요하다고 적었다.
"당초엔 사회복지의 문제점에 대해 쓰려다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지적을 받았어요. 수차례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지쳐 울기도 했고요. 덕분에 공부는 많이 됐죠."
'대기업 사모님들의 은밀한 거래'는 미대 진학을 준비 중인 책담세 부장 이승희(2학년) 양의 논문이다. "대기업을 잘못 건드렸다가 화를 당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했다"며 웃는 승희는 대기업을 이끄는 이들의 부인이 그림 시장에서 큰 손으로 활동하면서 일고 있는 의혹들과 해결 방법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대기업이 비자금 조성 등을 목적으로 그림 거래를 한다는 뉴스를 접한 뒤 떠올린 주제예요. 주제는 빨리 잡았는데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고생을 좀 했죠. 하지만 땀흘린 만큼 보람도 큽니다."
차보경(2학년) 양은 '스웨덴의 출산, 육아정책을 배우다'라는 주제의 논문을 썼다. 사회복지학과 지망생인 보경이는 아직 걸음마 수준인 한국의 육아정책과 스웨덴을 비교하면서 부러운 마음이 컸다고 전했다.
"오랫동안 한 가지 주제에 매달려 공부해야 하는 과정이 쉽지 않더군요. 영어로 된 자료가 많아 해석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고요. 그래도 처음 쓴 논문치곤 괜찮지 않나요? 저 스스로는 100점을 주고 싶어요."
이들뿐 아니라 다른 회원들도 논문을 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주에 한 차례 정도 함께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논문을 작성해나갔는데 교과 학습과 병행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동아리를 이끌며 논문 쓰기를 지도한 안병학 교사에게 '글쓰기가 힘들다' '선생님이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는 등 하소연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결과물을 받아든 학생들은 고생한 결실이 논문집에 담긴 모습을 보곤 다들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안병학 교사의 기분도 마찬가지. 다만 안 교사는 학생들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성인들이 쓴 것에 비하면 우리 학생들의 논문은 흉내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하지만 관심 분야에 대해 파고들어 보는 시도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더구나 진로를 염두에 둔 글쓰기라 대입전형 때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고, 각자의 꿈을 키워나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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