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 포항 쪽으로 20㎞ 정도 가면 길안면, 길안면에서 10여 분을 더 달리다 보면 도로 오른쪽에 만휴정이라는 푯말이 나온다. 우측으로 꺾기 전 좌측 언덕 위를 보면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묵계마을 보백당 종가와 묵계서원, 그리고 신도비와 비각이 서 있다. 종택 맞은편에 있는 시내를 건너면 솔숲이 우거지고 석벽으로 둘러싸인 틈새로 폭포수가 그림같이 떨어지는데, 오래전부터 이곳을 송암이라 불렀다. 바로 묵계마을이다.
이 마을 입향조는 안동 김씨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 선생이다. 보백당은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앞산 깊은 계곡에 만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87세까지 지냈다.
그가 남긴 '내 집에는 보물이 없다(吾家無寶物). 보물이라고는 오직 청백이 있을 뿐이다(寶物惟淸白)'라는 유훈은 아직도 청백리의 표상이 되고 있다.
마을 주변에는 계명산자연휴양림과 폭포, 계곡 등이 즐비해 다슬기 줍기와 꺽지 낚시, 피라미 잡기 등 여름철 가족단위 관광객들로 붐빈다.
◆청백리의 표상, 만휴정의 주인 보백당 김계행
보백당 김계행 선생은 '청백리의 표상, 만휴정의 주인'으로 안동 김씨의 상징적 인물이다.
보백당은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로 1431년(세종 13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김혁, 부친은 비안현감 김삼근, 모친은 안동 김씨로 김전의 딸이다.
마흔아홉, 뒤늦게 대과에 급제했으며 오십이 넘은 나이에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 출사와 퇴사를 거듭해야 했다. 무오사화(1498) 이후 63세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풍산으로 내려와 만휴정을 오가며 유유자적했다.
훗날 보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 바로 묵계서원이다. 그래서 사람이 살지 않던 묵계리가 오늘날 비경의 문화유적지로 남은 것이다.
최성달 안동시 역사기록관은 "보백당의 삶은 선비들이 지향한 '청빈' 그 자체였다"며 "훗날 나라에서는 보백당의 청빈한 삶을 영원히 사당에서 모시라는 신위로 불천위(不遷位)라는 교지를 후손들에게 내렸다"고 말했다.
◆묵계서원과 안동 김씨 묵계종택
묵계서원은 안동 김씨 묵계종택과 함께 1980년 6월 17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됐다.
묵계서원은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凝溪) 옥고(玉沽'1382~1436)를 봉향하는 서원으로, 조선 숙종 1687년에 창건됐다. 이 서원은 1869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이후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 건물 등을 복원했다. 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보백당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6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서원 왼쪽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주사(廚舍'관리인이 살던 집)가 있다. 서원 중 다른 건물은 모두 후대에 복원한 것이나 주사는 서원이 훼철될 때 헐리지 않고 남은 것이다. 고건물답게 부재를 다룬 수법에 격조가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묵계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까지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18대 종손인 김해동 어른이 집을 지켰고, 그의 맏아들 김주현 선생이 경북도 교육감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최성달 기록관은 "김주현 교육감 시절 경상북도 초등교육계에는 도의교육(道義敎育) 열풍을 진작시켰는데, 이는 김 교육감이 청백리가의 종손으로서 가학(家學)에서 나온 정책을 반영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 종택은 보백당의 호가 당호로 게판되어 있는데 '보백당'(寶白堂)은 '청백을 보물로 삼는다'는 뜻이다.
묵계종택은 정침과 사랑채인 보백당, 사당으로 구성돼 있다. 정침은 ㅁ자형의 전형적인 안동지방의 주택으로 정면 6칸, 측면 6칸이 팔작지붕 집으로 보존상태가 좋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집으로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4칸 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으며 대청의 측면과 배면은 판벽에 문얼굴을 내어 바라지창을 달았다.
마루에는 보백당이란 현판과 보백당중건상량문이 게판되어 있는데, 보백당 편액은 조선 말기 한학과 서예로 이름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선생의 글씨이고 상량문은 번암 류연즙(柳淵楫) 선생이 지었다. 가묘는 본채 왼쪽에 위치하며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이 담의 전면에 솟을대문의 사주문을 만들었고 우측에 편의를 위해 일각문을 달았다. 가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맞배지붕의 소박한 건물이다.
묵계종택은 건물의 비례감도 좋고 구조의 짜임새가 튼튼하며 건립 당시 사용된 목재가 그대로 사용된 것이 많아 당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가치가 있다. 가구 등의 솜씨도 견실하며 건립 당시의 부재가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김주현(83) 19대 종손은 "보백당은 연산군 때 정치가 날로 문란해져 폐단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풍산 소산마을로 돌아왔다"며 "1498년 길안면 묵계리에 자그마한 정사를 꾸미고 그 편액을 보백당이라고 했는데, 이는 탐욕에 물들지 않은 맑고 깨끗한 선생의 심성을 잘 나타낸 당호이다"고 말했다.
◆만휴정
만휴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은 송암계곡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초기 문신으로 청백리에 오른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정자다. 선생은 연산군 6년(1500) 폭정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조용한 길안 묵계골에 들어와 은거했는데 이때 즐기던 곳이다. 만휴정 뒤로는 계명산, 앞으로는 금학산과 황학산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길안천까지 흘러 절경이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처마선이 날렵해 정자의 맛을 한껏 살리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와가로 되어 있다. 정자 앞쪽 3칸은 3면이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누각 주위 3면으로는 난간을 둘렀고 뒷면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눈 덮인 통나무 다리를 건너 쪽문을 열고 만휴정 대청마루에 앉으면 신세계가 따로 없다. 계곡 아래는 꽁꽁 언 송암폭포가 빙벽을 이뤄 절경이다. 보백당은 이곳에서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고 가문의 앞날을 준비하며 후진 양성을 위해 남은 여생을 보냈다.
보백당이 자손들에게 경계한 내용을 보면, '너희들이 잇달아 과명(科名)에 오른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더러는 나를 복이 많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집안이 번창한 것이 도리어 두렵다. 너희들은 이를 명심해 스스로의 몸가짐을 삼가고 사람들과 만날 때도 정성을 다해서 경박한 일로서 죽어가는 나에게 욕을 끼치지 말도록 하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이 평생 수양을 통해 터득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실천덕목이었다.
후손들은 그 뜻을 기려 '지신근신(持身勤愼), 대인충후(待人忠厚)'라는 여덟 글자를 현판에 새겨 만휴정에 걸어두었다. 또 지난 1993년에는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이사장 김주현'19대 종손)을 설립해 안동의 청렴하고 우수한 공무원과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며 보백당 선생의 고귀한 뜻을 이어가고 있다.
안동'권오석기자 stone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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